셀 사역

제목2022년 11월 13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근래 내가 보았던 일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일이 있다면?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455장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 복음성가 : 우물가의 여인처럼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무엇을 보고 있는가?
본문 : 히브리서 12:12-13
1) 저자가 지적한 수신자들을 향한 세 가지의 육체적인 질병과 그 의미는?


  

2) 세 가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영적 대안을 말해보자.
➊ 요한복음 6:66
➋ 히브리서 12:2
  

3) 적용하기
➊ 내가 보고 있는 것들 중에 주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장애물은?
➋ 내 인생의 여정 중에 내가 곁길로 탈락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➌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추수감사주일에 실시되는 전 교우 재회의 날 사역을 위해
  (3주차 사역을 위해)
2. 이번 주간 진행되는 특별새벽기도회 참여 독려와    셀원들의 카풀 점검
3. 수험생들을 위하여 중보
4. 환우들의 회복을 위해 (김현미 집사: 14일-제 3차 항암)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설교요약 (SUMMARY)
다시 한 번 지난 주일에 이어 선택한 본문을 나누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저자는 배교 위험에 빠진 자들에게 세 가지의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⓵ 피곤한 손 ⓶ 연약한 무릎 ⓷ 저는 다리 저자가 지적한 이 세 가지의 어긋나 있는 육체적 상태가 곧 배교에 위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수신자들의 상태임을 직격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한 가지를 살펴보십시다.

1) 피곤한 손입니다.
 이 구절을 접하면서 느끼는 체감 온도가 있습니다. 주후 60년대 로마 근교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정황입니다. 베드로전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베드로의 이 편지가 AD 63년경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주지하다시피 AD 64년에 있었던 네로가 저지른 로마의 대 화재로 인해 누명을 쓰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에 베드로도 함께 순교를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정설이라면 분명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일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여 다음 구절을 읽어 보십시다. 베드로전서 1:6-7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이 가슴으로 다가오실 것입니다. 왜 이 구절을 소개했을까요?

  약간의 연대적인 차이가 있고 공간적인 틈도 있겠지만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정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히브리서 첫 번째 문을 열면서 히브리서의 저작 연대를 보스턴 대학의 구약교수인 다니엘 J. 해링턴 박사의 해석으로 소개했습니다. “히브리서는 헬라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1세기 60년대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에 써 보낸 설교로 본다.” (다니엘 J. 해링턴, “최근 히브리서 연구 동향”, CLC, p,103)

  주후 60년대 로마라면 베드로전서의 메시지가 공감되던 시대일 것입니다. 로마와 그 근교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중에는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했기에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를 간직하며 살았던 성도가 있었는가 하면, 기독교신앙이라는 이름은 갖고 있었지만 명목적 그리스도인이었기에 심각한 핍박에 노출되어 있어 기독교 신앙을 버릴 것을 저울질하고 있는 명목적 신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신실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메시지였다면, 히브리서는 위험천만에 노출되어 있는 연약한 신자들을 향한 권면의 메시지이자 경고성 멘트인 셈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에 배교할 위험성이 있는 자들을 향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첫째로 지적한 불완전한 상태를 ‘피곤한 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반기독교적인 공격에 방어능력이 없는 이들을 가리켜 ‘피곤한 손’을 가진 자라고 에두른 것입니다.

2) 연약한 무릎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약한 무릎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약한 무릎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육체적인 차원에서 정의한다면 서 있을 지탱 능력이 현저하게 약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영적인 상태로 본 연약한 무릎을 이야기 합니다. 로마와 그 근교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순교를 각오해야 했던 시대적 암울함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이로 인해 일어날 힘조차 없는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던 주후 60년대였기에 이들에게는 영적으로 믿음을 지탱하려는 의지가 현격히 저하되었습니다. 그랜트 오스본 교수는 무릎이 연약해진 자들의 상태를 이렇게 부연해 설명했습니다. “징계나 박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쳐온 두려움이다.”(그랜트 오스본, “적용을 돕는 히브리서”, 336.) 주후 60년대 로마를 중심으로 근교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상태는 말 그대로 최악의 상태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 저는 다리입니다.
  이 세 번째 상태 역시 믿음의 경주를 뛰는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음질을 하는 데 다리를 저는 연약함이 있다면 결과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꼴찌를 하든지, 아니면 중도에 포기를 하든지 해야 하는 치명상입니다. 물론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이 비유는 ‘어그러지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엑트라페’가 단순히 비틀어진 상태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탈락하다, 혹은 이탈하다’의 의미이기에 기독교 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난 배교를 의미하는 강력한 경고성 멘트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결국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갖고 있는 자들은 저는 다리가 되어 믿음의 경주에서 포기하거나 이탈하는 불행한 결과를 자초하고 있음을 저자가 본문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본문 이해를 놓고 보면 대단히 우울한 분위기입니다. 로마라는 세속의 왕국은 건들지 못할 엄청난 괴물입니다. 동시에 그 제국에서 번성하고 있는 각종 제국의 우상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기독교 신앙을 선택함으로 맞닥트려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은 무게감이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앞뒤가 막혀 있는 것처럼 진퇴양난이며, 사면초가의 고통이 주후 60년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흔들리고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 유대교로 돌아가는 배교를 감행하려는 시도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정황을 이해하고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 제게 이상한 감정이입이 제 심장에 타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지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느낌이 본문의 정황이라는 감정이었습니다.
마치 2022년을 사는 한국교회의 영적 정황이 주후 60년대의 로마 근교의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했던 일체의 영적 기상도와 너무 비슷하다는 자괴감이 설교 준비를 하는 내내,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더 더욱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몸부림을 인위적인 직업의식의 발로라고 착각하지 마십시다.

  주후 60년대에 살고 있었던 로마 근동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글을 남겼던 히브리서 저자는 그 희망의 끈을 강력하게 제시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했으니 말입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정의했습니까? 가장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 가장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저는 히브리서 강해 내내 교우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라는 우울한 기상도 앞에서도 우리는 주눅 들지 말아야 합니다.

  주후 60년대에 로마 근교에서 활동하셨던 가장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21세기라는 시간으로 뛰어넘어온 오늘에도 가장 뛰어나신 우리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는 단 1%의 변함이 없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위험천만의 수신자들에게 이 영적인 참담함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했던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하며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 그리고 저는 다리로 휘청거리고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지만 다시 한 가지에 집중하면 우리는 아무리 거센 파도도 이길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기에 교우들에게 히브리서 저자가 제시한 영적인 위험을 이길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앞서 히브리서 저자가 본 텍스트인 12장의 시작으로 알려주었던 그 위대한 명제를 다시금 우리들의 심장에 새겨 넣으십시다.
12: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내 시선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벳세다 율리아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압력을 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제자들을 갈릴리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던 갈릴리 벳세다 즉 게네사렛으로 보내시고, 산으로 올라가신 뒤에 다시 게네사렛에서 재회하셨음을 복음서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벳세다 율리아스에서 왕으로 옹립하려던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았던 민중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이 계셨던 동선이 갈릴리 서북쪽인 게네사렛이라는 것을 알고 그곳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몰려든 그들은 다시 예수께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게네사렛에서 만난 예수는 그들에게 이번에는 대단히 단호하게 생뚱맞은 발언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6:26-27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정곡을 찔린 민중들은 예수님의 이 발언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신적인 표적을 요구하자 다음과 같이 마침표를 찍는 발언을 이어가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요 6:35, 48),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요 6:51),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요 6:55)”등등의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런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을 한 예수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민중들은 더 이상 예수께 집착하지 않고 그를 떠나갔다고 요한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담론에서 요한은 대단히 주목할 구절을 남겼는데 6:66절은 우리 교우들도 깊이 새겨야 하는 구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을 떠난 간 자들은 어중이떠중이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자 중에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제자는 마땅히 제 2,3제자 군에 속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일을 보셨던 주님은 제 1제자 군이었던 12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선임 격이었던 제자 베드로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 베드로의 고백을 이렇게 재정리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서 시선을 떼지 않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 제 시선을 고정하겠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면서 여러 가지로 접근하며 교우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줄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욕심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여러 가지의 교훈 찾기보다 더 선명한 은혜가 저를 강권했기 때문입니다.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내 시선을 떼지 않는 방법은 그분이 내게 주신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라는 교훈이야 말로 영적 교훈의 극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의 고백은 최고의 답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은혜를 놓치지 않을 때 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를 고칠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놓치지 않을 때, 믿음의 경주에서 탈락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붙들 때, 곧은길로 달릴 수 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동기 목사 아들 결혼 주례를 섰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선 주례라서 조금은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곧바로 중심을 잡고 결혼식을 인도했습니다. 친구 아들이 혼례를 치룬 장소가 교회가 아니라, 예식장이었기에 결혼식 이전부터 친구 목사가 어렵게 부탁했습니다.
“이 목사, 결혼 예식이 30분 안에 끝나야 한단다. 그래야 사진도 찍는 후속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하니까 주례 설교는 5분 정도 부탁한다.”

제가 결혼 순서 매뉴얼을 만들어 보낼 때 부를 찬송가도 2곡이었는데 한곡으로 리젝 당했고, 그 한 곡마저도 1절만 부르는 것으로 사전 조율되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결심했습니다. 혹여나 다음에 교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결혼 주례 부탁이 오면 허락하지 않기로. 그럼에도 친구 목사 아들이라는 무게감 때문에 짊어진 설교를 5분 안에 끝내기로 하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을 부부에게 전해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 전합니다. 예수 잘 믿으세요.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이탈하지 마세요. 두 사람의 가정 한 복판에 예수님의 자리를 양보하세요. 설교 끝”

마태복음 6: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부분의 앞 절을 Living Bible 에서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You give God first place in your life." 너는 너의 삶의 가장 첫 자리에 하나님이 있게 하라’ 모든 것을 다 양보해도 이것은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제임스 패커 교수가 그의 걸작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신학에 대한 관심, 하나님에 대한 지식, 기독교 주제들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고 말 잘할 수 있는 능력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38.) 하나님에 관해 아는 지식의 일체는 본질이 아닙니다. 부수적인 도움이요 자료일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눈에서 떼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이 시선은 결국 말씀에 대한 집중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