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10월 9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을에 부르면 참 좋은 노래 한 곡 소개하기  

 
찬양 (WORSHIP)
● 찬송가 536장 – 죄짐에 눌린 사람은  /  ●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  본문 : 히브리서 11:32-40
1) 35-38절에 기록된 보고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을 나누어 보십시다. (설교를 중심으로)
⓵ 35절
⓶ 36절
⓷ 37절
⓸ 38절  

2) 39-40절을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와 담임목사와 부연설명으로 해석해 보자.
⓵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해석
⓶ 부연 담임목사의 해석  

3) 적용하기
⓵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이 이기지 못한다. 레마로 나에게 적용해 보자. 
⓶ 김근주 박사의 갈파를 나에게 적용해 보자.
“신앙은 유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성립한다.”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수요 성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2) 카풀 확인하여 지원하기
3) 섬기는 피선교지 중보 및 셀 별 기도제목 숙지하고 반드시 중보하기
4) 환우들을 품고 기도하기
5) 수요일 말씀 피드백 잘 하기  

 
설교요약 (SUMMARY)
2022년 10월 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성령강림주일 이후 열여덟 번째 설교)
본문 : 히브리서 11장 32-40절 제목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오늘 본문에는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하여 일일이 열거하여 설명하기가 벅찰 정도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2절 전반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창세기 초창기의 인물인 아벨을 시작으로 기생 라합까지 적지 않은 세대를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한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밝힌 것입니다. 너무 많은 선진들이 있었고, 또 앞으로 소개할 사람들도 적지 않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문을 연 저자는 6명의 인물들과 특정할 수 없는 선지자들을 언급합니다. 첫 네 사람은 사사들이었고, 이어 다윗과 사무엘이라는 정치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인 선지자들을 등장시킵니다. 이렇게 대표적인 인물들을 소환한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을 소환한 이유에 대하여 33-35절에 걸쳐 세 가지의 이유 때문임을 밝혀 줍니다.

⓵ 군사적, 도덕적, 정치적 업적을 이룬 지도자라고 칭송합니다. (33절 전반절)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⓶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극복한 선진들이라고 말합니다. (33절 하반절-34절 상반절)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⓷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며 위업을 이룬 선진들이라고 말합니다. (34절 하반절)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들을 하나 같이 칭송한 저자는 결국 이들에 대하여 이런 끝맺음을 하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믿음의 선진들이었음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이렇게 믿음의 선진들을 보고한 저자는 이어지는 35-38절에서는 또 다른 선배들을 소개합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옥에갇히는시련도받았으며돌로치는것과톱으로켜는것과시험과칼로죽임을당하고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본문에 대한 이해는 학자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겠습니다. “35절에 기록된 여자들은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소생시킨 것(열왕기상 17:17-24)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린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6절에 기록된 심한 고문을 받았던 자들의 통칭은 구약 외경인 마카베오스 2서 6:18-31절에서 보고하고 있는 율법학자 엘르아살을 지칭하는데 그는 선 채로 죽임을 당했고,그의 뒤를 따라 일곱 명의 형제와 이들의 어머니들도 순교를 당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스 2서 7:1-42) 36절에서 말하고 있는 ‘또 어떤 이 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에 해당하는 부류들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당했던 고난과 결박, 그리고 옥에 갇힌 정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37-38절에 있는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중략)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돌에 맞아 죽은 일과 사악했던 왕 므낫세를 비판하다가 톱에 잘려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예언자 이사야를 가리키는 것이며, 광야, 산, 토굴을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믿음의 선진은 엘리야와 더불어 동시대에 살면서 아합과 이세벨의 핍박을 받으며 죽어갔던 일체의 예언자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박찬웅,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주석”, 172-173) 조금 긴 인용문 이지만 박찬웅 교수의 이 주석을 교우들에게 소개한 이유는 제가 갖고 있는 히브리서 자료 중에 교우들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해석해 놓은 주석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외경에 대한 이해를 제외하고는 이해의 폭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11장의 마지막 구절을 나누겠습니다. 39-40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참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히브리서의 주 수신자인 배교 직전에 있었던 유대적인 성향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소개한 저자는 이렇게 39-40절을 피력한 뒤에 믿음 장을 종결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구절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이해를 돕겠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약속 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산 그들의 삶도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저는 유진 피터슨의 이 구절을 읽다가 정말로 그의 지성적 영성에 혀들 내두를 정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시 주지해 봅니다.

  히브리서는 배교의 위험성이 높은 자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구약 시대에 살았던 그 어떤 존재 보다 월등한 주님이심을 알리는 것이 히브리서 저작의 목적이라고 선언하며 히브리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저자가 히브리서의 후반부에서 구약과 중간시대를 아우르는 시대의 통전적인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한 뒤에
39-40절에서 이렇게 갈무리했는데 유진 피터슨 목사가 다시 재해석한 글을 ‘메시지’에 이렇게 담은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일갈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이지만 그 감동을 조금 더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강덕 목사의 언어로 문장화 시키겠습니다. “이들 중에 그들 당시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일체의 고난으로 인해 무슨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 복을 받은 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그런데도 그들은 묵묵히 고난에 동참했다.동시에 이들이 이런 엄청난 천로역정의 길을 감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조금의 의심 없이 믿음의 길을 갔던 그 은혜와 감동을 이해하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그 감동을 내 감동으로 엮을 수 있고 이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도 그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이 갖고 있었던 믿음은 오늘(주후 1세기)을 사는 히브리서를 쓴 나도, 읽고 있는 당신도 함께 공유할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38절에 기록된 괄호 안의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학자들은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의 표기법 중에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삽입구로 표현할 때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괄호 안에 있는 삽입구는 아마도 히브리서 저자가 가장 강조하려고 했던 메시지의 핵심적인 주제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이 구절을 헬라어 원어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해석됩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습니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오늘 설교의 레마를 이렇게 정하겠습니다. ※ 믿음이 있는 자는 세상이 이기지 못합니다. 본문 33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은 그의 총명함과 정직함 때문에 다리오왕의 총애를 받고 바벨론의 총리로 등극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을 시기한 바벨론 출신의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들의 음모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총리들과 방백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을 알고30일 동안 다리오 왕 이외에 어떤 존재에게도 절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선포하는 것을 다리오에게 건의하였습니다. 다리오는 이 금령에 도장을 찍고 왕의 칙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오늘부터30일 동안에 왕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 절을 하는 자들은 사자 굴에 던진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을 잡기 위한 음모였습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6: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구절에 기록된 ‘알고도’라는 아람어 ‘예다’의 시제는 과거완료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칙서에 왕 외의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 절을 하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은 지 오래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모두가 조심하는 국가적인 분위기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지했듯이 다니엘은 절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 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기독 연구원 느헤미야 교수인 김근주 박사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다니엘서는 불이익과 위협 앞에서 한결같이 변치 않는 신앙을 증언한다. 신앙은 유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성립한다.”(김근주, “다니엘 처럼”, 대장간, 173) 정말로 엄청난 성찰입니다. 믿음은 내 유익 때문에 갖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갖는 절대적 명제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데 그를 사자들이 위협한다고 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삶의 유익을 위해 신앙을 택한 자들은 얼마든지 사자들의 공격에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을 취미 생활로, 레저 활동으로, 현대인들 중에 중산층 지성인들이 갖추어야 할 종교로 선택한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천로역정을 경주하는 자들이 어찌 세상의 공격에 넘어질 수 있겠습니까? 영적 공식이 맞지 않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뿌드의 전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뿌드의 나이가 83세가 되었습니다. 뿌드는 그 해 눈에 질병이 생겼습니다.그 사실을 아들 브람웰을 통해서 듣게 되었습니다.윌리암 뿌드는 잠시 침묵 후에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아들아!다시는 네 얼굴을 볼 수 없게 되겠구나.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길을 아실 것이란다.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눈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끝냈단다.이제 나는 하나님과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눈이 없는 가운데서도 할 수 있는 하려고 한단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주일에 이상민 목사를 사역지로 파송하며 인용했던 성경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사도행전 20:22-24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어떻게 이런 사람을 세상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난 30여 년 동안 교회현장을 섬겼습니다. 사역을 하는 동안, 참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사람들을 통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목사가 된 이유는 목회를 하고 싶어서였는데 목회만 하는 것을 도무지 용납하지 않는 일련의 무리들로 인해 목사 로브를 벗으려고 했던 고비와 위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파도를 건널 때마다 몸 하나를 움직일 수 없는 넉-다운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주님이 오셔서 한 두 번이 아니라 제게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난 네가 정말로 필요하다.네가 없으면 난 안 되겠다.나 하나만 갖고는 안 되겠니?” 하나님이 내가 없다고 하나님의 일을 중단시키시겠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하지만 교부 신학자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때,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나를 사랑하실 때는 나 하나 말고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에게 목매어 사랑하신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를 어떻게 세상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달 읽었던 김훈 작가가 쓴 ‘하얼빈’에서 작가는 소설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다.” (김훈, “하얼빈”, 문학동네, 305) 건방짐의 도를 뛰어 넘어 야만적 광기에 사로잡혔던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친 제국적인 발상을 세 발을 총성으로 잠재웠던 안중근에 관한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전율했습니다. 금요일에 짧은 서평을 남기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토는 숨을 몰아쉬었다. 비서관이 범인은 조선인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토는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바보 같은 놈.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 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p,167) “김훈이 공들였을 이 장면을 읽다가 속울음이 터졌다. 너무 기쁘고 감동적이어서. 마치 내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서평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분명한 정신과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 사람들도 이렇게 적지 않은 감동과 선한 영향력을 세간이 펼칩니다.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찌 세상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훗날 믿음의 후배였던 장로 요한은 이렇게 그의 서신에 사족을 남겼습니다. 요한일서 5:4절 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믿음으로 사십시다. 세상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으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찬양 -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