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10월 2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좋아하는 시 한 편 소개하고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449장 – 예수 따라가며 
●  복음성가: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믿음의 요체
● 본문 : 히브리서 11:30-31
1) 라합과 여호수아가 이끌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함께 가졌던 믿음의 요체를 히브리서 11:1절을 적용하여 말해 보자. (설교를 참고하여)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믿음의 요체가 순종이라는 문장을 달라스 윌라드와 본회퍼 목사의 갈파로 다시 새겨보자.
본회퍼의 갈파
달라스 윌라드의 갈파  

3) 적용하기
⓵ 나는 순종하는 성도인가? 
⓶ 순종하지 않는 성도라면 무엇이 순종을 방해하고 있는가?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수요 성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2) 카풀 확인하여 지원하기
3) 섬기는 피선교지 중보 및 셀 별 기도제목 숙지하고 반드시 중보하기
4) 환우들을 품고 기도하기
5) 수요일 말씀 피드백 잘 하기
6) 부교역자 교체에 따른 교회 사역 충실히 감당하기

  

 
설교요약 (SUMMARY)
2022년 9월 25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성령강림주일 이후 열일곱 번째 설교)
본문: 히브리서 11:30-31            제목: 믿음의 요체

오늘 본문은 창세기와 광야 시대를 지나 가나안 정복 초기 시대라는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여리고 성 함락 기사와 그 여리고에 살고 있었던 기생 라합에 대한 성경적 증언입니다. 이제 이 두 사건에 대한 원전이 들어 있는 신명기 역사서의 대표적인 성경 텍스트인 여호수아서의 본문으로 교우들을 초대하겠습니다. 지금 언급한 두 사건은 여호수아 2장과 6장에 공히 기록된 메시지입니다. 먼저 2장에 기록된 기사인 라합 텍스트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여리고성 점령을 위해 두 명의 정탐꾼들을 여리고로 급파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선 이해로 가져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동편의 여러 성들과 마을들을 점령하여 빼앗은 사건을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은 여리고 뿐만이 아니라 가나안 곳곳 심지어 지중해 해변의 도시들까지 공포에 떨게 했다. 이 시기 히브리인들의 가나안 침략은 위정자들에게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다. (중략) 이런 이유로 여리고 성은 철통같은 경계를 펼쳤다. 그들은 성내에 수상한 사람들이 없는지를 살폈고, 누구도 성 안으로 들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성경적 표현으로 철옹성 같은 성벽으로 철벽 방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김진산, “역사와 지리로 만나는 성경 이야기”,90) 성서지리학자인 김진산 박사의 여리고 성에 대한 정황 이해입니다. 여호수아 6: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이런 상황에서 여리고를 공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 명의 정탐꾼을 급파한 것입니다. 하지만 철통같은 경계로 인해 두 명의 정탐꾼은 여리고 입성부터 극도로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봉착해서 나름 많은 남성들이 드나드는 환락가로 잠입하기로 마음을 먹고 라합이라는 창녀의 집에 은신하게 됩니다.

많은 극단적 보수주의적인 목회자들이 라합을 창녀로 인정하지 않고 미화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근거로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라합을 여관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라합에 대한 최대의 예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라합은 기생이 맞습니다. 기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자나’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매춘하다, 바람나다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이기에 몸을 파는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맞습니다. 왜 그녀가 매춘하는 여성으로 전락했는지는 성경 내증이 보고하지 않으니까 섣불리 추측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윤리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삶을 살았던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무사히 여리고를 빠져 나가도록 끝까지 배려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다. 더불어 이윽고 시작된 여리고 함락 전쟁 시기에 그녀가 정탐꾼들에게 제시한 요청과 정탐꾼들이 반대로 제시한 요청들이 합일되어져서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된 것을 우리는 성경적 내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22-2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또 하나,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여리고 성 전투에 대한 내증입니다. 여호수아의 군대와 백성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요단강을 건너는 데에 성공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입니다. 이제 여리고성을 함락해야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여리고 성은 공략 절대 불가의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김진산 박사의 여리고 성의 건축 상태 설명을 소개합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진술은 매우 흥미롭다. 여리고 성은 이중 성벽 구조로 내벽, 외벽, 두 겹으로 되어 있으며, 외벽은 5미터 높이에 2미터 두께이고, 내벽은 14미터 높이로 건축된 성이었다. 특이하게도 기독교와 유대교 사본 전승에서 여리고 성은 원형이 일곱 겹 미로와 같은 성벽으로 묘사되어 있다.” (위의 책, 91) 성서고고학적인 정황으로 볼 때, 여리고 성은 말 그대로 군대라는 말을 쓰지만 고도의 훈련된 정예 군사들이 아닌 어찌 보면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민간인 수준이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점령하기에는 너무 높은 담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진에서 펼쳤던 행동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종교적인 행군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7번 돌기였습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전투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전투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수아 6:20-21절이 답해 줍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단 두 절로 이루어져 있는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왜 이렇게 적시했는지 지금까지의 역사적 배경 설명으로 이해하셨을 줄 압니다. 제가 극도의 요약된 언어로 본문을 축약하여 설명한 것은 구체적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군사적, 역사적 정황을 말씀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영적 함의가 오늘 본문 안에서 한 단어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기생 라합도, 말도 안 되는 군사작전을 폈던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했던 신앙적 공통분모를 오늘 교우들과 공유하고 단어가 그 단어입니다.

※ 순종이었습니다.

라합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고백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고백과 요청이 여호수아 2:8-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⓵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수 2:9)
⓶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다. (수 2:11)
⓷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수 2:12)
그러자 정탐꾼들이 한 가지를 전제하여 라합의 청을 들어 줄 것을 약속합니다. 여호수아 2:14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있어서 적군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집에 급습한 이방인이 자기를 해할지 모른다는 염려로 타협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 발언과 진의는 구체적으로 라합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 대한 정보가 명명백백하다는 점에서 설득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전혀 생소한 자들과 언약을 맺었던 것을 이 정도의 내용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녀는 여리고 성에 함락 전쟁 때에 창문으로 붉은 줄을 내 걸라는 명령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들을 살려줄 것이라는 약속의 이행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에 조금의 이의를 달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엄청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에 거의 무장해제의 상태로 줄을 맞추어 성을 7번 돌았습니다. 성을 돈 것 말고는 어떤 다른 행동도 가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이 되어서야 두 가지가 첨가되었습니다. 나팔 불기와 소리 지르기입니다. 이게 무슨 군사병법입니까? 이유는 딱 한 가지,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일러준 여리고 함락 작전의 메뉴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한 딱 한 가지의 신앙적 행동은 순종이었습니다. 라합과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했던 공통분모는 순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1절을 믿은 사람들이었다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합은 자신과 가족들이 구원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 실상에서 이루어질 것에 대하여 순종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내 삶의 증거가 될 것에 대해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단문이지만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결코 틀리지 않는 명제입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61) “나는 그렇게 할 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한, 첫 발걸음을 내딛기 원하지 않는 한, 그대는 믿음이 없다” (위의 책, 66) 제가 신학교시절 열광했던 영적 모델이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선포했던 신앙의 마그나카르타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부교역자로 사역하다가 교회를 떠난 목회자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프지만 토로해 보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목회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수년간을 부교역자로 섬겼습니다. 정말로 목회자로 보기에는 전혀 아닌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놀라운 일을 목격했습니다. 나 같으면 절대로 순종하지 않을 것 같은 목사님의 말에 성도들이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 해석이 안 되는 목회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인 교회에 와서 더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세인교회는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하기 어려운 상식적인 목회를 하고, 성서적으로 조금도 이탈하지 않는 거의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성서적인 목회자가 말하는 교회인데 교우들이 목사의 말에 이렇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게 정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날 제 스스로 부끄럽고 초라한 제 멘털을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를 해야 했던 저는 너무 힘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주 오래 전, 이재철 목사께서 쓴 ‘매듭짓기’에서 읽은 내용을 하나 전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같은 교단 동역자 목사가 자신의 목회 현장의 경험담을 이 목사께 전해 주었습니다. 교인 한 명이 부친의 이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장 장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현장에 담임목사가 도착을 했습니다. 마침 인부들이 분봉을 무너뜨리고 무덤을 파 관을 꺼냈습니다. 관은 이미 여기저기 썩어져 있었고 인부가 관 두껑을 연 동시에 시커멓게 썩어 있는 수의와 시신을 휘감고 있는 나무뿌리가 보였습니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시신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이름 모를 징그러운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벌레들이 관 두껑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시체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따라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인지라 시체는 썩는 악취를 풍겼습니다. 몇 차례 구토를 하면서 이리저리 삽을 휘둘러도 벌레는 시체에서 떨어지지 않아 인부가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돈도 좋지만 더 이상 역겨워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인부들이 포기를 하자 이제는 그 일을 상주들이 해야 했습니다. 상주들이 열심히 벌레들을 삽으로 휘두르며 쫒아냈지만 벌레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하늘을 가리 우고 있는 구름이 열리며 그 틈 사이로 햇빛이 시신을 비추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체에 달라붙어 있던 그 많은 벌레들이 흐물흐물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햇빛이 일거에 그 벌레들을 쓸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목양의 현장에서 근 30년 이상을 사역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지체들과 부대끼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분명히 신앙인의 이름으로 사는데 마치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름 모를 벌레들처럼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견고한 사탄의 무기를 갖고 사는 신자들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입니다. 이 벌레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아무리 신자라는 이름을 갖고 살아도 송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벌레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순종이라는 햇빛을 받는 것입니다. 그 햇빛이 내게 비춰지면 나는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본회퍼 목사의 선언을 다시 복기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61) “나는 그렇게 할 만한 믿음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한, 첫 발걸음을 내딛기 원하지 않는 한, 그대는 믿음이 없다” (위의 책, 66)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순종은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는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요체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