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수요 기도회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7-13 제목: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교훈 서론) 고대 도시인 버가모의 왕이었던 유메네스에게는 왕이 된 이후 늦게 본 동생 앗탈루스가 있었습니다. 남자 동생이 태어나자 유메네스의 신하들은 후한이 두려우니 앗탈루스를 살해하라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던 유메네스는 신하들에게는 동생을 죽이는 것으로 가장하여 신뢰할 만한 부하를 시켜 아주 먼 곳으로 피신을 시켜 동생을 보호하게 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중 유메네스 왕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동생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동생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결정적인 걸림돌이라고 여긴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비롯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형은 병사합니다. 나라는 선왕의 뜻을 받들어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을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릅니다. 왕위에 오른 앗탈루스는 이윽고 선왕이었던 형이 자기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앗탈루스는 형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빌라델피아’ 즉 ‘형제 사랑’ 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그림 같은 비극을 품은 이 도시가 바로 빌라델피아입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어간, 빌라델비아로 가는 도중 가이드가 해 준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도시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어간, 이 도시에서 17명의 순교자 탄생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순교를 당한 폴리캅과 관련이 있는 순교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폴리캅이 86세에 이단적 사상이었던 로마 황제 숭배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게 되자 폴리캅 감독이 외롭게 혼자 순교를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빌라델피의 신실한 형제들 중에 몇 사람들이 서머나로 건너가 폴리캅과 함께 순교를 당했다는 이야기 전언이었습니다. 듣다가 또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빌라델피아는 ‘형제 사랑’ 이라는 이름의 도시에 참 합당하구나! 하는 그런 감동이. 저는 지금 도시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교우들에게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본론)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중에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는 2개입니다. 서머나 교회와 지금 말씀드리는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는 지난 주에 설교의 배경이 되었던 사데라는 도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4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 멀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데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는 5번째와 6번째로 붙어 있습니다. 아이러니는 이 두 교회가 칭찬과 책망의 극과 극을 달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을까요?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의 당시 정황을 알아보십시다. 빌라델피아는 당시 전형적인 농업이 주를 이루었던 도시였습니다. 유명한 포도나무 집산지로도 아주 유명한 곳이 빌라델비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 중에 빌라델피아 쪽으로 이동하는 노정에 펼쳐진 거리에는 포도나무들이 지천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포도 농사를 비롯하여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이곳은 농사를 경영하는 자들이 부를 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외부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지주들은 권력이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자기들의 땅을 빌라델비아에 거주하던 농민들에게 소작을 맡겼고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의 땅을 경작해야 했던 빌라델비아 사람들은 무거운 노동과 막대한 세금과 땅주인들에게 바쳐야 하는 의무 소출로 인해 고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피폐함에 허덕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마땅히 그들은 가난했습니다. 가난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 역시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주지할 수 있는 것은 소작농들 거의 대부분의 헌신과 피와 땀이라는 요소를 담보하여 빌라델피아는 움직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힘이 없는 땅의 백성들을 성경은 ‘암하레츠’라고 합니다. 빌라델비아의 교인들은 ‘암하레츠’ 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지체들을 설명해 주는 본문은 역사를 뛰어넘어 보호해야 할 ‘암하레츠’ 들을 위한 장대한 서사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렇게 환상을 보이시며 빌라델피아 교회의 암하레츠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내십니다. 먼저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기록된 이 분은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빌라델비아의 암하레츠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칭찬하셨습니까?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칭찬 내용을 보면서 첫 번째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1)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것이 더 아름답고 존귀하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환경적으로 암하레츠들인 빌라델비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작구나’ 그런데 이 주님의 말씀이 참 따뜻하게 들립니다. 작다는 말이 책망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를 들립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작은 능력을 갖고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칭찬 때문입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지체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이런 칭찬이 참 귀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주님의 칭찬보다 더 큰 위로와 감동은 주님이 인정하신 ‘작은 능력’ 이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작은 상황인데 거기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가만히 보면 주님의 이 칭찬은 참 성서적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함께 연합한 왕들에게 납치되어 있었던 롯을 구하기 위해 데리고 갔던 사람이 몇 명이었습니까? 318명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부족을 이끌던 족장이었습니다. 그가 거느릴 수 있는 가신들은 이미 기천에 이르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데리고 간 자가 고작 318명이었다는 점이.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기드온에게 몰려왔던 용장들을 32,0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기드온과 함께 하여 미디안을 물리친 인원은 300명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믿는 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 엄청난 인원을 영적으로 지배하던 인원은 12명의 사도들과 7명의 집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던 자들은 500여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령을 체험하고 교회의 역사를 태동하게 만든 지체들은 120명이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작은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사야 60:22절을 봅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성경적인 주님의 약속들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세속적인 판도나 평판이나 도는 큰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큰 것을 추구한 뒤에 더 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작은 것, 작은 자에게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신 주님이 칭찬하신 핵심적인 키워드는 ‘작은 능력’ 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능력은 참 볼품이 없습니다. 빌라델피아에 살고 있었던 소작농들의 능력이라고는 정말로 별 볼이 없는 능력이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 극찬하셨습니까? 작은 능력을 갖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그 작은 능력을 갖고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극찬입니다. 저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신 주님께서 행하신 진정성이 담보된 칭찬에 감동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 것이 없다고 주저하지 마십시오. 나는 별로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작은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능력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상황에 따라 자기에게 맞게 변질시키지 않는 순결함을 칭찬 받았습니다. 본문 9-10절을 눈 여겨 보십시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빌라델비아 교회 안에는 유대인들이 이미 많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빌라델비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역시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추론됩니다. 사데 교회의 경우에서도 보았지만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사탄에게 붙들려 사는 자들로 보는 것이 소아시아의 경우에는 더 적확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심각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오죽하면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그들을 사탄의 회라고 지칭했겠습니까? 또한 주님은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대표적 특성이 무엇입니까?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악함에 있는 유대인들의 핍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소아시아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하던 핍박이 오늘날 무슬림들이 가하는 이방인들을 향한 핍박과 너무나 흡사함을 지적합니다. 마을에서 추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권리를 박탈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누명을 씌워 로마 당국에 황제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고발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감안할 때 본문에 기록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이라는 주님의 칭찬이 이해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또 다른 은혜와 도전을 받게 됩니다. 말씀은 상황에 따라 변질시키는 대상이 아니라는 교훈 말입니다. 빌라델비아 신자들은 이런 고난을 전제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따라갔습니다. 액면 그대로 아멘하고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요 며칠 요한복음 9장을 새벽에 살폈습니다. 태어나면서 앞을 보지 못하던 시각장애인을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급속도로 퍼졌고 갈릴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켜 유대 종교 당국을 긴장시킨 예수가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놓고 예루살렘에서는 충격적인 일로 인해 산헤드린 소속의 바리새인들은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영적인 펀치를 한 방에 맞은 바리새인들이 일을 축소하기 위해 부심했습니다. 보게 된 자를 불러놓고 딴지걸기를 시작합니다. 누가 너를 낳게 했느냐? 너는 감히 어떻게 안식일에 이런 일을 만들어서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질서를 파괴하느냐? 너를 고친 사람이 누구냐? 그가 어디에 있느냐? 그를 너는 믿느냐? 심지어 당사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자 이제는 그의 부모를 불러 시비하며 똑같이 딴지를 겁니다. 부모에게도 시비를 걸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자 다시 장본인을 불러 또 다시 예수에 대하여 인정하지 말라는 쪽으로 압박을 가합니다. 그때 그들이 너무나 한심한 것처럼 보이자 압박을 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쐐기를 박는 한 마디를 그들에게 전하며 폭탄선언을 합니다. 요한복음 9:24-27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다시 바리새인들 앞에 선 고침 받은 시각장애인은 너무 기막힌 모습으로 영적 폭탄을 투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일렀어도 듣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그 저의를 알면서 기막힌 레토릭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가가 되려 하나이까?’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던진 이 남자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습니다. 왜 주님이 소아시아의 7개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보내면서 후렴구로 이 문구를 남겼을까요?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말씀으로 듣지 않으려는 자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애굽에서 우리는 인도하여 낸 우리들의 하나님이라고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자와 너무나도 똑같습니다. 말씀은 상황에 따라 변질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황을 말씀에 굴복시켜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말씀을 내 상황에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맞추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내 상황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그 말씀 안에서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들의 삶을 승리하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요한을 통해 주시는 편지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시면서 작은 능력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핍박과 고난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변질시키지 않은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10-12절 본문을 다시 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자세히 살피십시다. 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②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리라 ③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 ④ 너희들이 이름을 새 예루살렘에 새겨 주리라 네 가지의 복을 추려 종합해보니 성도들이 받아야 할 축복의 답이 다 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기억합시다. 이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지순례 때 방문한 빌라델비아 유적지 동영상을 시청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성지 순례 때 빌라델피아 유적지에 도착하여 보자마자 제일 먼저 들었던 첫인상은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감동이었습니다. 유적지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성 요한 교회의 터전들 중에 지진으로 거의 대 부분 쓰러진 건물들의 흔적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교회를 지탱해 주던 기둥들은 무너지지 않고 아직도 그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감동 때문이었을까요? 나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요한계시록의 그 기둥의 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는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의 영적인 승리를 경험해서 약속하신 이기는 자에게는 주시는 복들을 다 소유하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