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수요 기도회 설교
제목: 사데 교회에 주시는 교훈
본문: 요한계시록 3:1-6
서론)
저는 개인적으로 사데 교회에 대한 영적 교훈을 되새김질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2007년 한국교회 부흥 100주년 기념 대회에서 하셨던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라는 제목의 설교입니다.
당시 옥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1907년 평양에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되어 전 한반도를 휩쓸었던 성령 강림의 대역사는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하면서 성령 대 부흥의 100년이 지난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유일한 방법도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의 철저한 회개로부터 시작됨을 재 강조했던 것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당시 옥 목사의 설교를 잠시 뒤돌아보면 한국교회가 사데 교회와 너무나도 흡사한 교회임을 지적하였습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라는 이 책망이 한국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이라고 강타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옥 목사께서 외쳤던 그 외침은 당시 정말로 어마어마한 충격파로 한국교회를 밀어 넣었는데 그렇게 외침이 있은 지 8년이 지난 오늘 한국교회의 위상이나 영적 기상도는 고기압으로 좋아진 것이 아니라 더 저기압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아 못내 아쉽고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저 또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에 못내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데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2007년 옥한흠 목사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경종을 주었던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한국교회를 사랑하셔서 계속해서 회개의 경종을 울려주는 것은 현재진행이라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저는 사데 교회에게 주시는 본문 말씀을 통해 제일 먼저 다가오는 은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구제불능인가 할 정도의 둔감함을 갖고 있는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을 향하여 이제 그만하자 라고 포기하실 수 있을 것 같은 주님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또 다시 인내하며 기다리시면서 아직도 기회는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망극한 사랑과 은혜입니다.
아무리 내 입장에서 스스로 점수를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내하실 만큼 인내하셔서 이제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결단하셔서 당신의 긍휼하심의 손길을 거두셔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인데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의 교회,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인내하고 또 인내하시면서 오늘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그 사랑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저 또한 난감할 정도인 것이 사실입니다.
해서 저는 용기백배하여 하나님의 이 기다리시는 사랑에 힘입어 사데 교회를 향한 교훈을 우리 교우들과 다시 한 번 또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왜 하나님은 사데 교회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를 본문을 유추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교회와 성도들의 세속화입니다.
본문 1절을 조금 전에 보았습니다.
이 구절이 가슴을 무섭게 찔리게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곡 찌르심이기에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분명히 하신 외침이 있었습니다.
네 행위를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설파는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들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이 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나의 행위입니다.
가만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감출 수 있는 나의 추악한 비밀,
사람들은 멀쩡하다고 여기며 심지어 참 괜찮은 그리스도인이야, 저 정도면 본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표면적 신앙인인 나의 감추어져 있는 영적인 더러움과 이중적인 삶을 주님은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존재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나의 은밀한 행위를 아신다고 선포하신 주님 앞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2절을 보십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있습니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하나님이 왜 사데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무섭게 책망하였을까요?
그것은 사데 교회의 신자들이나 사데 지역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크리스천들의 세속화입니다.
전혀 세상과 다르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삶, 이것이 무엇입니까?
성도라는 이름만을 갖고 있는 자들의 세속화입니다.
(영상을 하나 보겠습니다.)
지난 소아시아 성지 순례를 통해 사데를 방문하였을 때 너무 놀랐던 것은 사데 지역에서 당시 섬기고 있었던 아데미 신전 터의 위용을 보고서였습니다.
사데 사람들은 이 우상의 제단을 실로 어마어마하게 건축했습니다.
지금은 지진으로 거의 대부분의 터가 무너졌지만 그 당시에 세워진 기둥들이 오늘의 사데 터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할 정도입니다.
거기에 비해 사데 교회는 정말로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문에 십자가 표시가 있어서 이곳이 사데의 교회 터라고 짐작할 수 있지 도무지 이런 곳이 교회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소아시아 교회의 큰 교회 터였을까를 의심할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초라함이 남아 있어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건물의 크고 작음을 통한 외형적인 비교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상징인 아르테미(아데미)의 위용에 비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예배당의 초라함을 보면서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들의 영적인 피폐함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버려짐, 영적 우선순위의 무감각, 성령의 통치하심에 대한 거부 등등이 바로 사데 교회의 치명적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데 교회는 버젓이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번지르르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사데 교회를 다음과 같이 그의 강해 집에서 표현했습니다.
① 영적인 묘지 같은 교회
② 거짓 명성을 가진 교회
③ 위선을 행한 교회
여기까지 사데 교회를 진단하면 정말로 유구무언이며 사면초가이며 고립무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게 책망을 받은 교회인 사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내 심령을 울컥하게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저는 이 구절이 눈물 나게 반갑습니다.
사데 교회에 이런 성도가 있었다는 인정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흰 옷 입은 자 몇 명’
사데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 전부가 이름만 살았지 실상은 영적으로 싸늘하게 송장처럼 죽어 있는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영적으로 싸늘한 묘지와 같은 교회, 거짓 명성으로 포장되어 있던 교회, 위선을 행하던 교회 안에는 그것들과 정 반대로 영적인 순결함을 사수하고 고독하지만 세속적인 일체의 것들과는 타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 흰 옷을 입은 자 몇 명이 있었다고 일곱별을 가지신 주님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백성들을 축복하십시다.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본문 5절을 눈 여겨 보십시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당신의 몇 안 되는 백성들을 향하여 약속하셨습니다.
① 지속적으로 흰 옷을 입게 하리라
②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으리라
③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여 줄 것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성도가 달려갈 길의 끝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왜 이 땅에서 우리가 수고합니까?
영적인 분투를 합니까?
고독하지만 이 길을 갑니까?
바로 주님이 사데 교회의 몇 안 되는 이런 성도에게 약속하신 그 은혜와 축복을 믿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데 교회를 통해 주시는 두 번째의 교훈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교회와 성도의 세속화를 거부하고 그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천만 다행으로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본문에 보니까 몇 명이 있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방점을 찍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몇 명입니다.
이런 합리화가 비겁해 보이십니까?
한 명도 없다고 말씀했다면 절망인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몇 명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기뻐하는 것이.
그런데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 말씀에 너무 위로가 되는 것은.
남북 분열 왕국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과 길 예언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들이 삶은 풍요와 안락함과 평안함으로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흉 예언자들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예레미야, 미가야, 아모스와 같은 흉 예언자들은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와 테러의 위협과 왕따를 당하는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역사서를 자세히 보면 길 예언자들은 850명처럼 대다수입니다.
그로나 흉 예언자는 항상 엘리야처럼 1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수적으로도 완전히 열세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세속적인 물결과 거슬려 싸우는 자들은 항상 역사적으로 불리하고 또 불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그 몇 명 안 되는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은혜입니다.
항상 주님은 그렇게 움직이셨고 활동하셨고 응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몇 명’ 이라는 이 단어가 저는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위로가 됩니다.
앞서 설명했던 옥 목사님의 100주년 대 각성 성회의 메시지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사랑의 교회를 목회하면서 교회가 부흥되자 하나님이 두려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두려워졌습니다. 몰려온 사람들을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때부터 설교를 조심스럽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는 가급적 피했고 꼭 전해야 하는 내용이 있으면 부드럽게 전했습니다.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설교를 했고 항상 그들에게 인기 있는 목사가 되려고 부단히 타협했습니다. 죄, 십자가, 헌신이라는 설교를 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복, 은혜, 축복, 샬롬 등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 결과 무서운 일이 초래되었습니다. 나는 한국교회를 망친 장본인이 되었고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 목사께서는 이렇게 피를 토했습니다.
“하나님, 이놈이 죽일 놈입니다. 하나님, 이놈이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하나님, 이놈이 한국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 살려 주옵소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한국교회의 거성이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한 지 8년이 지났건만 그 설교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슬픔입니다.
한국교회는 사데 교회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립니다.
이 두렵고 떨리는 시대에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그 몇 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몇 명이 우리 교회의 지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가지를 담보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본문 3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는 것 즉 회개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회개하라는 단어가 바로 헬라어 단어 중에 성경에 기록된 회개라는 의미의 단어인 ‘메타노이아’ 즉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지하여 나눌 수 있는 회개가 무엇입니까?
성도로서 살면서 무감각하게 아무렇지 않게 자행했던 세속화의 길에서 벗어나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결단이요 행함입니다.
입으로의 회개가 아닌 벗어남, 완전한 삶으로의 돌이킴입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던 그 돌이킴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글로바와 또 다른 제자들이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으로 갔던 그 행위의 돌이킴입니다.
김기석 목사는 ‘인생 교과서 예수’ 에서 이렇게 돌이킴을 정의했습니다.
“회개란 ‘돌이킴’이고, 하나님을 등진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서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기막힌 갈파입니다.
이 땅의 첨예한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영적인 여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세속화의 물결을 거슬려 올라가는 삶인 하나님을 향해 서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접겠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유고집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실린 한 예화를 말씀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친구 사이인 암탉과 돼지가 교회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교회 게시판에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을까?’ 라는 설교 제목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암탉과 돼지는 서로 한참을 의논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이 때 센스 있는 암탉이 ‘아침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달걀을 하나하고 햄 한 조각을 주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돼지가 발끈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잠깐 앉아서 힘만 주면 달걀 하나를 쉽게 낳을 수 있지만 나는 햄을 주려면 내 생명을 주어야 한다고.”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살면서 달걀 하나 던져주는 것으로 성도의 삶을 포장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또 하나 주님은 나를 위해 생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내 생명만큼은 너무 소중하기에 절대로 나는 헌신할 수 없다고 결의하면서 성도로 이 땅에서 살고 있다고.
사랑하는 세인 공동체 지체 여러분!
계산할 때 이미 성도는 성도의 삶을 이탈한 것입니다.
계산할 때 이미 교회는 교회의 몫을 상실한 것입니다.
계산하는 자는 결코 흰 옷을 입은 몇 명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데 교회에 있었던 흰 옷을 입었던 몇 명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 000명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