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2일 수요 기도회 예배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2:18-29 제목: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 서론) 목사님 너무 늦게 글을 올려 죄송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갖고 있던 기도에 대한 생각을 수정하게 되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어딘가 저위에 높이 계신 하나님께 뭔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깊이 숨어 계시며 온 누리에 계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과 ”부산히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다리는 것“ 이라는 것이 가장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특히 “젖 뗀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듯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묵상하게 됐습니다. 왜 젖먹이가 아니라 하필 젖 뗀 아이 일까? 젖 뗀 아이는 무슨 특징이 있는 걸까? 젖먹이아기가 엄마 품을 더욱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제 나름 생각은 이러합니다. 젖먹이는 엄마를 젖만을 위한 존재로 압니다. 젖을 떼야 비로소 엄마품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으며, 젖을 떼야 이유식을 먹는 더 한 단계 성장하는 단계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젖만을 바라며 엄마를 바라보는 것은 내가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더욱 성숙한 단계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 존재를 깨닫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나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느낀 것은 자기 안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린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저의 딸 ○○이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당연한 것이고 인간은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이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신데 왜 그것을 경계하신다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온 우주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온전히 마음 가득히 채우면 자식에 대한 근심도 자랑도 모두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조금 깨달았습니다. 저에게는 누가 봐도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직도 먼 얘기지만 조금씩 깨우치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저와 함께 독서 여행을 같이 하고 있는 ○○○ 집사님 ‘사귐의 기도’ (p33-48)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내 주었습니다. 메일을 통해 읽은 집사님의 독후감에 진정성이 묻어 있는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이 책의 목적은 기도의 영성을 알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신학적으로나 아니면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삶의 기도를. 해서 이 책이 참 귀하고 복된 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도 집사님이 이 책을 다 섭렵하고 나면 기도를 완벽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아니라 바른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젖을 먹는 아이와 젖을 뗀 아이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는 집사님이 참 아름답습니다. 정답의 여부를 떠나 말씀에 대한 해석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박수를 받을 만하기 때문이지요. 정답을 말씀드리는 것보다 저는 집사님의 그 움직임에 더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또 하나 ○○이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의 ○○이의 비전과 집사님이 홀로 염려할 때 이루어지는 ○○이 의 비전은 비교할 수 없는 폭이 있습니다. 아마도 집사님들과의 교제를 통해 두 분 다 저는 ○○이를 향한 하나님의 플랜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를 벌써 기대합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성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여정들을 갖고 계신 집사님을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독서 여행은 3-4과입니다. 샬롬의 인사를 전합니다. 신앙의 진보란 무엇일까? 를 질문할 때마다 어김없이 저에게 감동으로 오는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여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입니다. 생각을 한다는 차원에서 설명을 드린다면 두 종류의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생각하며 살기입니다. 이것은 고전적인 방법인데 전형적인 보수적 계통의 사람들이 많이 취하는 방법입니다. 사유함에 더 많은 점수를 주는 경우입니다. 반면에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경우입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씨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방법인데 살면서 생각하기입니다. 이것은 진보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으로 삶으로 말하며 책임을 지는 것을 더 강조하는 경우입니다. 개인적으로 추론해 보면 이 두 가지는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가지의 경우, 모두 다 생각하고 사유하고 성찰하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로 본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방법론들도 이럴진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무슨 재강조가 필요하겠습니까? 앞에서 소개한 집사님이 사귐의 기도를 공부하는 어간, 성숙한 기도의 영성을 “젖 뗀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있듯이” 라는 해석에 천착하면서 왜 젖을 물고 있는 아이라고 저자가 말하지 않고 젖을 뗀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라고 했을까? 에 생각의 관점이 머물러 고민하고 성찰하다가 엄마의 젖만을 바라보는 미성숙의 단계가 아닌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성숙에까지 도달할 때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갖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깨달았다는 보고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박수를 보내드렸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계속해서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큰 일 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이 보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교훈을 보면 성숙하지 않을 때 오는 위기와 위험을 아주 잘 알게 됩니다.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본론) 두아디라는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중에 등장하는 4번째의 소아시아 교회였습니다. 오늘의 지명으로는 ‘아키히사르’ 인 두아디라는 우리가 먼저 살핀 버가모와 사데 교회 중간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소도시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경에서 두아디라를 사도행전과 오늘 본문인 계시록에서 만납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두아디라를 추적해 보십시다. 사도행전 16:14절입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들어섰을 때 자색 옷 장사를 하고 있었던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루디아였습니다. 헌데 성경은 그녀의 출신 도시가 바로 두아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디아는 자신의 고향에서 만이 생산되는 당시 비단으로 대변되는 자주 비단을 가지고 멀리 있는 그리스 땅 마케도니아의 빌립보까지 가서 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증거 하고 있는 바울의 말을 듣고 개종하여 빌립보 교회를 태동하게 하는 결정적인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왜 그녀는 자주 장사를 했을까요? 그녀의 고향인 두아디라는 당시에 구리 세공업, 제혁(製革)업, 염색 업, 모직 업, 면직 업 등에 종사하는 길드 조직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말은 두아디라가 오늘로 이야기를 하면 의류 산업의 집산지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루디아도 고향에서 생산되는 의류들을 머리에 이고 빌립보까지 건너가 이윤을 얻었던 보따리 장사였던 셈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당시 최대의 길드 조직이 있었다는 말은 그 길드 조직이 바로 두아디라의 우상과도 같은 대상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 책망을 먼저 보십시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의 치명적인 책망거리는 이세벨이라는 자칭 선지자라고 떠벌이는 여자를 용납한 것이라고 지적을 합니다. 학자들은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아디라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히고 무너뜨렸던 기폭제를 신비주의라고 24절에 근거하여 해석합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여기에 기록된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주후 1세기에 번창했던 신비종교라고 보기 때문에 이세벨이 교회에 끌고 들어온 것 역시 신비주의적인 종교적인 내용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성지 순례 기간 동안에 두아디라는 방문했을 때 가이드를 통해 들었던 내용을 더 근접한 이세벨이 이용한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해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길드조직의 막강한 힘입니다. 주후 1세기에 구리 세공업, 제혁(製革)업, 염색 업, 모직 업, 면직 업 등등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자들이 노동조합의 형식으로 상인들의 압력 단체인 길드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해석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일 것입니다. 우리 제천이라는 도시는 적어도 제천중학교와 제천고등학교를 나와야 뭔가 할 수 있다는 말, 뭐 그런 것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두아디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두아디라의 길드 조직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두아디라의 상인 조직은 거의 절대적인 도시의 압력 단체이었고 힘이었고 권력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설득력으로 다가온 것은 이세벨이라는 자칭 여선지자가 바로 이 두아디라의 길드 조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해 서로가 야합하는 그런 관계였다는 말입니다. 돈과 성과 힘과 종교적인 이단 교리가 함께 뒤엉켜 각자의 이익을 공유함으로서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며 두아디라를 장악한 것입니다. 두아디라는 이세벨과 세속적 권력의 야합으로 여기에 속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힘든 처지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입니다. 교회도 이런 영적인 일탈을 자행하는 이세벨의 사탄적인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영적 자존감을 갖고 잘 달려갔습니다. 본문 19절의 칭찬을 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무슨 말입니까? 두아디라의 성도들은 사업에도 주 뜻대로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두아디라의 성도들은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고 믿음도 있었고 섬김도 있었고 인내도 있었습니다. 더 칭찬을 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런 영적인 장점들이 지속된 정도가 처음보다 더 나아졌다는 점이었습니다. 시작보다 나중이 더 좋은 성도, 교회가 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두아디라가 그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아디라는 교회의 역할에 있어서 나름 승리를 하였다는 점입니다. 여기까지만 성경이 보고를 하였다면 두아디라는 참 괜찮은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두아디라의 칭찬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두아디라는 이어지는 성경에서 주님으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받습니다. 본문 20-21절을 아프지만 눈 여겨 보십시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구절에서 나타난 책망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① 앞에서 언급한 이세벨을 가르치게 허용했던 일. ② 그녀가 그리스도인들을 꾀어 음행을 범하도록 용납한 일. 이 일은 아마도 길드 조직과 연관하여 당시 이세벨이 추구하던 신비적인 우상 숭배를 암묵적으로 용인했던 것을 말한 것으로 추측됨. ③ 그녀와 그녀를 허용한 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했지만 듣지 않은 일. 주님은 이런 일탈과 용인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 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경고하셨습니까? 22-23절을 다시 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심판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 큰 환난 가운데로 던질 것이다. Ⓑ 그의 자녀들을 죽이리라 Ⓒ 행위대로 갚아 줄 것이다. 설교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지체들에게 돌이키고 이세벨의 행위를 미워하여 그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대로 하나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마지막으로 살펴보십시다. 본문 24-28절입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세 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다. ⒝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신 새벽별을 주리라 성서신학자인 허머(HERMER) 는 그의 계시록 해석에서 이런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일곱 편지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어려운 편지가 가장 유명하지 않고 가장 중요하지 않은 두아디라 도시에 전해졌다.” 허머의 말대로 오늘 설교에서 보셨듯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은 어쩔 수 없이 열거해야 할 만큼 내용이 많습니다. 성지 순례 여정 중에 눈으로 보고 온 유적지들 중에서 두아디라는 가장 초라했습니다. 정말로 현장에 도착해 보니 남은 것은 처참하게 나뒹구는 돌무더기뿐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성지 순례일기를 기록하기 위해 메모한 메모장에 이렇게 남겼겠습니까? “도시의 한 복판에 남아 있는 흔적 터는 몹시 을씨년스럽다. 이세벨의 가증함을 용납한 교회의 오늘의 흔적은 ‘내가 큰 환난 가운데로 던질 것’이라는 주님의 예언이 고스란히 적용된 둣 하여 쓸쓸하다.” 이상의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성경적 교훈과 성지 순례를 통해 느꼈던 감흥을 종합할 때 종은 아주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나누고 싶습니다. ※ 주님이 행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세벨이라는 사탄적인 매개를 소개함으로 그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심판하심을 분명하게 선 긋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너무나 선명한 선 긋기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한 가지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는 신앙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생각하지 않는 천박한 그리스도인들이 됩니다. 반대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의 내용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님의 유고집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를 읽다가 가슴이 뭉클 하는 어른이 외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 영적인 사유함과 사색함이 없는 자들은 이 말이 무슨 뚯 인지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천착하며 그 뜻의 의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은 이 의미에 가슴 벅차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지체들이 주님이 명령하신 돌이킴과 회개함이라는 명령을 진지하게 사유했다면 오늘날처럼 그렇게 을씨년스러운 오늘을 맞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서 솟구칩니다. 바울은 이미 알았기에 이렇게 고백한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서 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설교의 마지막으로 친구 목사가 보내 준 감동적인 영상을 하나 보고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청년 김건희 형제의 영상 시청)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