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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교훈2024-06-04 16:13
작성자 Level 10

2015년 7월 8일 수요 기도회 예배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2:12-17
제목: 버가모 교회의 교훈       

서론)

지난 소아시아 성지 순례 기간 중 버가모는 터키에서 마지막으로 들렸던 지역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지명 이름으로는 ‘베르가마’ 라고 지칭하는 데 이 지역은 지난 수요일에 살펴보았던 서머나 즉 이즈미르에서 북쪽으로 약 90km 떨어져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너무 놀랐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림을 먼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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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시는 두 개의 그림은 사진 하나로 다 담을 수가 없어서 두 개로 나누어 찍은 사진입니다.
첫 번째 그림은 버가모 교회 유적의 상층부를 찍은 사진이고 두 번째 사진은 하층부를 찍은 사진입니다.
그림을 보시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시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나름대로 큰 건물로 보이는 본체 건물로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참 신기했습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은 무너져 있는 이 건물더미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을 수 있겠지만 목사인 저에게는 이 본체 건물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영적인 의미를 갖게 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12절과 16절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신 주님의 음성 중에 날카롭게 들리는 구절이 보입니다.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저는 버가모 유적지에 방문을 하자마자 느낀 감흥이 있습니다.
주님이 휘두르신 검으로 성전 터가 두 개를 갈라진 것 같은 감흥 말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버가모 유적 터는 지진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진의 흔적으로 인해 버가모 교회의 흔적이 두 동강이 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왠지 저는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유적의 흔적을 보면서 왜 12절과 16절의 말씀이 오버랩이 되었는지 역시 직업의식은 못 버리겠구나 하는 감흥에 젖어보았습니다.
저의 생각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진짜로 주님은 왜 이런 책망을 버가모 교회에 내리셨을까요?
한 번 즈음 버기모 교회에 주신 본문의 교훈을 추적하면서 상고해 볼 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함께 오늘은 페르가몬으로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본론)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당시의 버가모는 본문에 기록된 정보에 의하면 몇 가지 분명한 상황이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이 구절을 보면 당시 버가모에는 사탄의 권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사탄의 권좌라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에 해석에 의하면 거의 일맥상통하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에서 볼 때 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 숭배 신전 터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버가모는 주전 29년에 로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건축하는 기염을 토했던 장소입니다.
이 말은 소아시아에 있었던 도시 중에 가장 먼저 로마황제 숭배를 시행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뿐 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헬라의 다신들 중에 하나로 알려진 디오니소스와 아스클레피오스 우상 숭배 터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땅은 황제 숭배외에 또 다른 우상숭배의 터전이었다는 학자들의 해석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 드린 것은 버가모의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일상적 종교성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 땅에 세워진 버가모 교회는 한 술 더 뜨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증언을 들어보십니다.
14-15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날선 이를 가지신 이가 이렇게 버가모 교회를 지적합니다.
“너희들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또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도 있다.”
성경적인 증언으로 우리는 주님이 지적하신 두 가지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발람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이제 마지막 정복의 대상이었던 모압의 발락에게 돈으로 매수되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저주를 할 뻔했던 불의의 점술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인해 저주가 아닌 도리어 축복의 메시지를 말한 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발람을 말할 때 항상 뒤따라오는 레테르는 물질에 매수된 무능력한 종교 혹은 종교인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버가모 교회 공동체 안에는 세속적인 이익에 눈이 멀어 능력을 상실한 종교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또 한 종류는 니골라 당에 속한 자들입니다.
일전에 에베소 교회를 설명할 때 그곳에서도 주후 1-2세기 사이의 첨예했던 이단 사상 중에 하나인 니골라 당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상 중에 하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죗성을 갖고 있는 존재인데 이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주님은 죄를 짓는 자유를 주셨다고 가르치는 해괴한 교리를 신봉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에서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은혜 안에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참 그럴듯한 교리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어도 된다고 역설한 점입니다.
죄를 지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의 논리 전개 말입니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궤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런 해괴망측한 교리에 열광을 하고 그런 교리를 퍼트리고 다녔던 니골라의 패거리들을 추종했습니다.
이것이 버가모의 현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영적으로 결코 만만치 않았던 버가모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런 버가모의 현실을 직시하던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께서 이 교회를 향하여 외치셨던 메시지는 분명히 두 가지로 선을 긋습니다.
어떤 메시지였습니까?
칭찬과 책망이었습니다.
두 가지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본문을 의지하겠습니다.

1)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칭찬의 메시지였습니다.

13절을 다시 봅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칭찬의 메시지를 던지시면서 안디바를 소개합니다.
안디바는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에서 전혀 굴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갔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존 스토트는 안디바의 순교 장면을 자신의 책인 ‘What Christ thinks of the Church’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그는 총독 앞에 소환되었다. 총독 공관이 버가모에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총독은 정치 지도자이자 황제 숭배의 대제사장이기도 했다. 초석 위에 황제의 흉상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신성한 불이 타고 있었다. 향 몇 조각을 불에 던지며 “시저는 주님이시다!” 라고만 말하면 됐다. 그러면 안디바는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예수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세례 받을 때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는 단순한 말로 자랑스레 믿음을 고백한 그가 아니었던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오른편에 올리셔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배웠던 그가 아니었던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성령의 감화의 징표이며 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를 저주할 자라”할 수 없음을 교사들에게 확실히 배운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숭고한 순교자의 반열에 합류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신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진리위에 서서 진리가 아닌 것에 항복하지 않는 신앙이라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외의 것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라고.
자기 편안함에 빠지면서 이것은 주님도 이해하는 것이라고 자위하지 않는 그런 영적 고집이라고.
나는 얼마든지 세상과 타협하면서 이것은 주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자유함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지 않는 절대적인 영적 고집이라고.
오늘 이 나라 집권당의 원내대표가 살아 있는 권력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는 자리에서 소회를 밝힌 퇴임의 변에 나오는 글을 읽다가 아이러니하게 아멘을 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저의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세상은 원칙을 무너뜨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세상은 편법이 법보다 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정의가 밥먹어주지 않는다고 비웃습니다.
교회는 고지식한 이 땅에 남은 유일한 골동품이라고 비아냥댑니다.
아직도 이미 고사한 성경을 믿느냐고 조소합니다.
예수라는 존재를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무지의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치를 떱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처절한 공격을 당할 때 도리어 영적인 감동을 느낍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조정민 목사의 글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 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듣기가 불편하여 교회를 떠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박수쳤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영적 자존감을 도리어 갖고 자랑스러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 예수께서 버가모 교회의 일부 지체들을 향하여 칭찬하신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내 이름을 굳게 잡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모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한 명이 학교에서 모든 공식행사에서 기도를 금한다는 교칙을 어기고 졸업생 대표 고별사에서 학교 측에서 준비한 원고를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즉흥적으로 자기가 준비해 간 원고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기도문을 다 낭송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학교에서 경험한 최악의 일은 기도를 금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옹호하고 그 분을 증언하기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후에 이 일이 이슈화되어 그 학생은 CNN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 그렇게 결정하고 그 일을 하기 까지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행동하기로 했습니까?
로이 코스트너: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이렇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기도가 불법이라고 치부되는 시대가 되어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시겠습니까?”
 
2) 주님의 이름을 버렸다는 배교의 책망이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버가모는 우상의 권좌가 있을 정도의 영적 전쟁터였습니다.
헬라적인 잡신들의 본거지,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살아 있는 권력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 이단 사상의 총아라고 하는 집단들의 창궐함 등등의 배교적인 일들이 버가모를 휩쓸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자들이 주님의 진리를 떠났습니다.
그 결과 당연한 일이지만 버가모는 영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군웅할거지역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오늘 우리 한국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조국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종교적 엘리트 집단들이 있습니다.
정확한 헌금, 성실한 예배 생활, 나눔과 구제와 섬김과 적절한 아웃리치와 정확한 교리적 순종과 기막힌 성경해석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영적인 엘리트 집단들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일련의 이 모든 일들이 배운 틀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 무서운 말을 쓰겠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하여 값없이 구원을 받은 자로서의 우러나오는 헌신과 감동의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인 보상심리나 엘리트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습관적으로 표출되는 일로 신앙의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상 주님의 이름을 붙드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임을 그들도 알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일을 그대로 시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만족의 종교 생활이든 아니면 그것이 그냥 바른 신앙이라고 믿는 어처구니없는 무감각 때문입니다.
저는 참석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동행 교회를 시무하는 문 목사께서 저와 하께 교제를 하는 어간, 저에게 이런 권면을 해 주었습니다.
적어도 문 목사께서는 저와 함께 교제를 하면서 이강덕 목사의 성향이나 신학적 바탕이 어떤 성향인지를 알고 있기에 저에게 더 가속 페달을 밟으라는 의미에서 ‘복음학교’에 입교해보시면 어떻겠느냐는 권면을 해 주었습니다.
복음학교는 김용의 선교사가 이끄는 순회 전도단에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라고 귓뜸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문 목사가 먼저 경험한 감동의 이야기를 하나 전해 주었습니다.
복음학교의 종강 즈음에 김용의 대표가 이렇게 피교육자들인 목회자들을 향해 피를 토했다는 이야기를.
“복음학교를 졸업하는 동역자들이여! 한 가지만 강하게 말씀드립니다. 여기를 졸업한 뒤에도 여러분이 복음마저도 교회 부흥의 수단을 삼는다면 진짜로 여러분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저는 그가 이끄는 학교를 참석해 본 적이 없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요즈음 저의 영적인 몸부림과 어쩌면 그렇게 진하게 일치하고 있는가에 전율했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장난이라고 듣지 마시고 우리 교우들도 깊이 성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로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목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전제했습니다.
말장난으로 듣지 말아 달라고.
목사의 가장 행복한 일은 목사의 길을 그냥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왜 목사의 길을 가지 않습니까?
목사에게 임하는 유혹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교인 숫자가 많아질 때 부수적으로 목사에게 임하는 세속적인 감투, 명예, 자리 등등의 유혹 말입니다.
교회 재정이 많아질 때 교회의 근본적인 사역인 선교와 구제와 나눔 이외에 앞서 말씀드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재정들을 소비하는 일들의 유혹들 말입니다.
그래서 종은 복음마저도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삼게 하려는 유혹들이 목사가 목사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고도의 사단의 전략임을 알고 근래 하나님께 더 얼굴을 파묻으려고 하는 영적 몸부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때때마다 머리를 쳐들고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의 머리처럼 목사가 가지 말아야 하고 걷지 말아야 할 영적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과 치열하게 전쟁하고 있습니다.
오늘 최은미 전도사와 전화 통화를 할 일이 있어서 참 오랜만에 전통으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전화 중에 안부를 물었습니다.
전선을 타고 들려오는 최전도사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 정말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요.”
제가 다그치며 말했습니다.
“그 교회에 보내신 것은 또 그만한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무릎으로 섬겨라”
전화를 끊으며 최전도사 전통으로 전해 준 말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상식이 무너진 교회의 일련의 일들은 해석이 불가능해요.”

오늘날의 배교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상식이 무너진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성도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배교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사유하고 성찰하지 않고 사사시대처럼 막 사는 것,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유익이 아닌 극단적 이기성의 발로로 내 것, 내 생각이 침범되지 않는 영역에서의 안주함이라는 것이 오늘의 배교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편지하는 주님은 칭찬을 받는 대상들과 책망을 받는 대상들 그들을 향하여 공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6-17절은 압권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책망을 받는 자들에게 돌이킬 것을, 칭찬을 받는 자들에게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줄 것이며 그 흰 돌 위에 주님의 이름을 새겨 줄 것임을.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주님이 휘두르시는 검을 통해 마지막 날 삶의 보고들이 둘로 쪼개지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의 이름이 흰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인 송호근 교수가 쓴 ‘나는 시민인가?’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강의실, 대한민국 최고의 준재들이 모여 있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전 내가 대학생 시절 가졌던 나를 가슴 뛰게 하였던 일을 상기하면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을 가슴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그러자 조금 뒤에 27세 먹은 복학생 한 명이 크게 소리쳤다. 취업입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이 나라를 어쩌지! 그리고 10분 휴식을 선언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 나라를 어쩌지! 라고 탄식하는 교수와 취업이 가슴을 뛰게 한다는 학생이 공존하는 나라가 이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이렇게 적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어쩌지!”
“내 조국의 대한민국 교회를 어쩌지!”
그리고 다른 것 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께 엎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붙들게 하옵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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