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은 페미니스트의 전형을 보여 주는 작가이자 지식인이다. 그녀의 글을 보면서 상식을 항상 뒤집어엎는 남자인데도 통쾌함을 마냥 느껴 대리만족의 희열을 느끼기까지 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녀의 글에 천착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事後) 해석’ 이다. 그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정희진 처럼 읽기 p.238에서) 나는 그녀의 말에 본질적으로 지지하는 손을 들고 싶다. 인생의 사후의 해석이며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에 생긴 후에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그녀의 해석에 신선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있다. 무엇인가? 그녀는 그래서 미래에 관심이 없다고 단언했는데 나는 도리어 그래서 미래에 대하여 더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나는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이것이 더 솔직한 지성에 호소하는 표현이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사후 해석에 대하여도 사실은 무지하다. 해서 어떤 때는 나의 미래에 대하여 부들부들 떨 때가 있다. 동시에 나의 무지 때문에 한없이 초라해 지기까지 할 때가 있다. 정희진이 말한 대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고 해서 사건 이후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그녀의 치열한 사유함을 인정하지만 나는 나의 사후의 삶을 나에게 맡길 마음이 전혀 없다. 이후는 간단하다. 나에게는 도무지 내 이성으로는 항거 할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삶의 그림자뒤편에서 일어날 일이 이미 주어졌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마디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고린도전서 15:10절 전반절) 너무나도 확실한 사후의 내 삶의 해석도 분명히 이럴 것을 믿기에 나는 나를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치열하려고 공부하고 사유하겠지만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눈물겹게 알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