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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8월 12일 수요 기도회 설교2024-06-04 16:23
작성자 Level 10

8월 12일 수요 기도회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3:14-22

제목: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교훈

 

서론)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면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 말을 풀어 헤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신실한 일꾼들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충성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충성은 대단히 중요한 성도의 요소라는 말입니다.

저는 충성이라는 이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같이 연상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 이라는 단어입니다.

열심이 있어야 충성할 수 있다는 단편적인 교훈은 당연한 상식입니다.

역으로 이야기를 해도 이 말은 분명하게 뜻이 들어옵니다.

충성하는 자들이 열심이 특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데살로니가후서를 주일 오후 예배에 살펴보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라는 괜찮은 교회 안에도 공동체의 열심이 있는 자들과 바울을 심히 염려하게 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게으른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빌미로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앞세운 것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는 것이었지만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정황을 보면 이들이 그렇다고 해서 재림을 준비하며 특별히 교회를 위해서나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주님을 위해서 특별하게 무언가를 선하게 행했다는 증거는 전무합니다.

게으른 자들은 그냥 일하기가 싫어서, 열심을 내기가 싫어서, 몸 품을 팔기가 싫어서, 무위도식하는 자에 지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근래 한국방송공사에서 대한민국 광복 70년을 맞이하여 대합창단을 조직하여 국민적인 정서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20대 연아 합창단, 1945년 해방둥이 합창단, 국회의원과 노량진 수산시장 상인들과 함께 하는 나는 대한민국 합창단 등이 조직되어서 광복 70주년 8.15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을 몇 번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시청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71세가 되는 소위 말하는 1945년 해방둥이들의 열정입니다.

71세의 나이는 아무리 의학이 발달되어 기대 수명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연수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대의 연아 합창단원들의 패기나 열정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거나 의기 소침되지 않고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열정은 나이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그렇습니다.

열심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무대 배경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책망하신 가장 큰 이유는 열심의 상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소아시아 7개 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교훈하신 특징을 살펴보면 칭찬이 없고 책망만 있다는 점입니다.

대체적으로 앞에서 보았던 교회들 중에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등등의 교회는 책망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래도 주님의 칭찬이 곁들여져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었습니다.

심지어 2주 전에 살폈던 사데 교회도 심한 책망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래도 그 교회는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었고 그들은 주님에게 합당한 자들이며 그래서 주님이 흰 옷을 입혀 줄 것이고, 생명책에서 이름을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는 칭찬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허나 오늘 배경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약간의 칭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오로지 무거운 책망만이 있습니다.도대체 오늘 본문의 배경인 라오디게아는 왜 이렇게 기막히고 비극적인 교회가 되었던 것일까요?저는 그 답을 두 가지로 정의해 보려고 합니다.

 

1) 회색주의 신앙 때문입니다.

 

본문 15-16절을 함께 나누어 보십시다.“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해하는 것은 특별히 소아시아 7개 교회 중에 어떤 의미로 보면 참 용이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당시 그 지역의 상황들을 적용하여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했기 때문입니다.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상태가 라오디게아라는 말입니다.

배경을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 유적지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8-12km정도 지역에 온천 지대인 파묵깔레 즉 성서적인 지명인 히에라볼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개척자로 여겨지는 에바브라의 고향입니다.반면 북쪽으로 약 8-12km 지점에는 골로새 지역을 아우르는 타우르스 산맥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라오디게아 고대 도시를 만든 안티오커스 2세는 8-12km 떨어져 있는 파묵깔레(히에라볼리) 온천지대에서 뿜어 나오는 뜨거운 온천수를 사용하기 위해 수로를 만들어 라오디게아까지 연결했습니다.반면 타우르스 산맥의 정상에는 만년설이 있어 항상 차가운 물이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도록 그렇게 도시를 계획하여 건립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서로 반대편 다른 지역에서 라오디게아까지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이 8-12km 정도의 거리를 거치면서 라오디게아까지 이를 때가 되면 둘 다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감안할 때 우리는 왜 주님께서 라오디게아를 책망하는 메시지로 찬물과 더운 물 그리고 미지근한 물의 비유를 했을까? 에 무릎을 치게 됩니다.

미지근한 영적인 상태,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한 라오디게아 교회 신자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회색적 신앙 상태였습니다.

이런 미지근한 상태를 주님은 매섭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메시지는 신앙의 회색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호하게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학자들은 교회 시대를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에베소 교회 - 사도교회 시대

서머나 교회 - 교부 시대-핍박과 순교의 시대

버가모 교회 - 타협의 시대;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한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시기인 국가교회 시대

두아디라 교회 - 중세 교회 암흑시대

사데 교회 - 종교 개혁과 분열의 교회 시대

빌라델비아 교회 -세계를 향하여 나간 선교 교회 시대

라오디게아 교회 -마지막 교회 시대

물론 이것이 모두가 인정하는 완벽한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시대의 나눔을 통해 교회를 해석하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기에 교우들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마지막 교회 시대라는 점입니다.

마지막 교회 시대의 특징이 라오디게아 교회라면 오늘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까지 포함하여 눈여겨보며 민감하게 보아야 할 내용이 이미 나왔다고 봅니다.

무엇입니까?“나는 그리고 우리 교회는 혹시 회색적 신앙을 갖고 있는 미지근한 상태는 아닌가?”

곱씹어야 할 내용입니다.

오늘 사탄의 활동은 신앙의 자리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신앙의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을 내거나 그 안으로 들어가 분명한 신앙적 색채를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탄의 공격으로 인해 선데이 크리스천의 양산, 교양적 그리스도인의 배출, 종교 다원주의적인 범신론적 신자들의 탄생과 불가지론적인 양태의 신자들까지 양산하는 등 기막힌 상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제는 신앙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버린 신자들이 지천에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교적 신앙을 이야기하면 전설 따라 삼천리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듣습니다.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입니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신앙을 말하면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말을 지금 하고 있다고 치부해 버리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입성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선포했던 여호수아 24장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단호한 일갈이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24: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가끔 묵상하는 창세기 12:4절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오늘의 교회를 영적인 라오디게아 교회라고 상징하는 학자들의 말을 수용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상당한 비극 중에 하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의 궤적이 아니라 롯처럼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따라가는 궤적에서도 이것이 괜찮은 신앙인 양 안도한다는 것이며 자위한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따라가도록 하는 신앙은 언제나 회색지대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나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이외 것들에 매료되어 신앙의 틀에서 걸어가는 자는 언제든지 회색적인 미지근한 신앙의 노정에 만족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치열하게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주님은 16절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2) 자기 성찰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상실하고 있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본문 17절은 참 예리한 주님의 지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본문의 글 쓰임이 기막힌 역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라오디게아 신자들이 미지근한 회색적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영적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이렇게 호언장담했습니다.

“우리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이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엄청나게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금융, 무역, 종교, 의학 등등이 활발했기에 부유한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이 도시에는 은행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무역로였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상인들이 이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의학의 신이었던 아스클레피오스를 섬겼기에 이 도시는 우상의 도시였지만 상당히 앞서가는 지식과 의술의 도시였습니다.해서 당시에 이 도시에는 의과대학이 있었습니다.이로 인한 시너지 효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라오디게아는 안과용 약물과 치료제로 쓰이는 원자재들이 많이 생산되었기에 안과가 특히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양들을 많이 길렀기에 값비싼 양털을 이용한 옷감들, 의복들, 그리고 카펫까지 만들어 팔아 막대한 부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부가 얼마나 컸든지 주후 60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상당수의 건물들이 파괴 되어 종주국이었던 로마의 황실에서 지진 복구 피해 자금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도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직접 본인들의 경제력으로 도시를 재건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경제적으로 부요한 자들이었습니다.그런데 이런 라오디게아 지역의 신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무엇이라고 책망하십니까?

“너희들은 진짜로 곤고하고 가련한 자들이다.”

또 하나 안과대학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도시였던 이 도시를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힐난하셨습니다.“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은 알지 못하는도다.”기막힌 역설이 아닙니까?눈을 고치는 기술이 최고인 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눈이 멀었다고 하셨습니다.양털로 만든 최고의 옷감과 피복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하여 벌거벗고 있다고 하셨습니다.지진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가 있었지만 제 삼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도시를 재건할 수 있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갖고 있는지 몰라도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영적 풍요로움에서는 아사 직전이었습니다.왜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교만함 때문입니다.왜 교만해집니까?자기를 성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자기를 살피지 않으면 교만해 집니다.라오디게아의 신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그들이 자기를 성찰하지 않게 하는 원흉이었습니다.

책을 한 권 읽은 자는 100권을 읽은 자보다 훨씬 더 더 교만합니다.본인이 한 권 읽은 책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뛰어 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교만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나약한 상태를 뒤돌아보지 않는 자가 어찌 겸손할 수 있습니까?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불쌍한 영혼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왜 날마다 나는 죽노라고 했을까?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뒤돌아보면 날마다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성찰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개인적으로 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차정식 교수의 책을 좋아해서 빼놓지 않고 읽는 편입니다.

그의 글이 진부하지 않아서입니다.

읽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저자와 독자가 치열할 정도로 싸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생각의 다름을 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그의 책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는 그래서 좋은 공부를 하게 해 준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습니다.

읽으면서 40개의 신약성서 본문의 통상적인 해석을 뛰어넘는 저자의 혜안에 공감하며 즐거운 여행을 했습니다.

저자는 40개의 테마를 쓰면서 통상적인 해석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 중에 하나만 예를 든다면 마태복음 11:12절 같은 경우입니다.“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이 통상적으로 열정을 다해 노력하고 봉사해서 천국을 자기의 것을 만드는 공격적 사역의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차 박사는 책에서 그 반대의 뜻임을 성서해석학적으로 밝힙니다.

쉽게 설명하면 천국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세례 요한을 죽였던 전혀ㅓ 천국답지 않은 자들(헤롯 안티파스와 같은 세속적인 자들)로 인하여 공격을 받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그래서 충격이 임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거꾸로’ 의 발상 때문입니다.

제가 그의 책을 읽기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거꾸로’ 는 고민과 사유와 성찰이 반드시 전제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생각하고 사유하는 학자이자 목사라는 말이 됩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가볍지 않은 삶을 살 때만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공부할 때 갖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너무나 중요한 지성의 산물인 셈이고 더 나아가서는 영성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목회를 시작한지 26년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왜 목사인가? 를 자문한다면 나는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목사라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위대한 명제 앞에서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오류적인 발상으로 말도 안 되는 상업적인 싸구려 삯군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에 목사로 사는 것이라고 성찰하고 자성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순간순간,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달려온 것은 이 생각하기와 사유하기라는 영적 자존감을 날마다 부유(浮游)시켰기에 가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은 목사로 살면서 가장 큰 비극은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말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시대의 비극 중의 비극은 목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있겠지만 정작 큰 비극은 목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살도록 사탄이 공격하고 삶이 공격하고 환경이 공격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냥 그렇게 살지 뭐!”

얼마 전, 일본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늦깎이로 읽으며 신학대학교 시절 그의 또 다른 책 ‘바다와 독약’을 접했던 생생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심판은 무감각이라는 고발을 서슬이 시퍼렇게 선포하던 작가의 일침을 풋내기 신학생 시절 경험하며 적어도 무감각한 목사가 되지 말자는 그 다짐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사탄은 날마다 나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그래, 그냥 그렇게 살아, 뭐 그렇게 네가 대단한 존재라고!”

이 공격이 임할 때마다 다시 성령의 힘을 힘입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생각이 멈추는 비극을 갖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사유함을 지속하는 목양이 되게 하옵소서,”

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가 그렇게 사유하고 묵상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그럴 때 교만해 지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비극은 자기 성찰을 상실했기에 시작된 비극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 비극의 교회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 어떤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까?

본문 18-22절을 봅니다.“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약하겠습니다.

① 나에게서 불로 연단할 금(타협하지 않는 승리하는 정금 같은 분명한 믿음)

② 나에게 대한 열심을 회복하라

③ 타협한 죄, 미지근한 죄를 회개하라

④ 내 안으로 들어오라

⑤ 성령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종합합니다.아무리 허물이 많은 교회라고 해도, 아무리 책망을 심하게 받은 교회라고 해도 하나님이 직접 주신 메시지로 돌아가기만 하면 교회는 마침내 승리하게 됨을 주님이 선언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등 어떤 교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고 권하시는 내용으로 돌아서면 하나님은 교회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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