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플랭클 박사의 그 유명한 걸작인 '죽음의 수용소'에서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아우스비츄에서의 비인간화 실상을 폭로한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에 있을 때 물을 주지 않아 갈증으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마침 창문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보고 너무 반가워 한 순간에 그 고드름을 땄다. 그러나 순찰을 돌던 한 남자가 그 고드름을 세차게 빼앗아 버려 너무 원망스러워 이렇게 레비가 서투른 독일어로 항변했다.
Warum?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그 남자가 레비에게 이렇게 답변하였다.
Hier ist kein warum? (이곳엔 이유 같은 것은 없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잔인한 고문은 이유가 없는 삶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압박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은 노력하는 동안 방황하는 법이다."
괴테가 말한 방황은 부정적인 어구가 아니다. 인간임을 증명해 주는 기막힌 증거가 방황이라고 말하고 있는 최고의 긍정적 어휘이다.
이 노력의 자원이 이유에 대한 질문인데 그것을 말살하였던 아우스비츄는 지옥이었다.
독일이 이런 악행을 자행한 것을 총리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사죄한다.
그래서 그 말은 정답인 것 같다.
역사를 모르고 부정하는 민족의 미래는 없다는 그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