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깁스를 풀고 나니까 워드작업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해서 아직은 무리하거나 막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사의 말대로 그대로 제일 부드럽게 이 작업부터 시작해 보았다. 나를 흥분하게 만든 탁월했던 글감들을 모으는 일을. 분명한 것은 어디 이뿐이겠는가? 의 소회이다. 그러나 한 번 추려보았다. 201년 나를 뜨겁게 해주었던 선배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치열한 글 읽기의 동역자들의 고견들을. 가슴 따뜻해지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2015년 촌철살인 베스트 10 10위: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 에서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그래, 가장 위험하던 것이 무엇이던가?” “하마터면 중국인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 팔덴 갸초(Palden Gyatso) 는 티베트의 최장기수 정치법이었고, 고통 받고 있는 티베트의 현실을 국제연합에서 최초로 증언한 티베트인이다. 중국에서 고문과 박해를 받고 삼십 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한 뒤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난 팔덴 갸초는 울기만 했다. 그간의 사정을 묻는 달라이라마에게 그는 울면서 말했다는 그 감동의 흔적. 9위: 김기석의 ‘흔들리며 걷는 길’ 중에서 “아무리 애써 봐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때 사람들은 세상에 순응하기 시작한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영혼의 타락이다. 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안주하는 것 말이다. 서럽도록 졸렬한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으려면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물기 없이 푸석푸석해진 마음으로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없다.” 떼제 공동체에서 거했던 김 목사의 일주일 체험기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기쁨’ 을 향하여 오늘도 진솔하게 한 발자국을 옮겼는가를 뒤돌아보게 하는 죽비의 울림으로 받았다. 같은 하늘에서 살면서 푸석푸석해지기 쉬운 오늘 하나님의 울림으로 나의 영혼을 울려주는 동역자가 있어 행복하다. 8위: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란 무엇인가?’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다운 사람의 진정한 삶은 자신의 바깥에 중심을 둔 삶 즉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다.” 레슬리 뉴 비긴의 이 글을 읽다가 갑자기 쉐마가 떠올랐다. 신명기 6:4-11절의 쉐마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특히 9절에 명백하게 명령한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는 말씀이. 왜 안 쪽문이 아니라 바깥문이라고 했을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될 공간이 우리들의 바깥임을 알려주는 지혜와 뜨끈함을. 내 안에 사는 나에게 갇힌 삶이 아니라 무서우리만큼 철저하게 내가 아닌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자만이 바깥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해 본다. “앎을 삶으로” 뜨거워진다. 7위: 송호근의 ‘나는 시민인가? 에서 “‘당신 아이는 괜찮은가?” “문을 열고 내 차로 오는 노부부의 표정은 그리 험악하지는 않았다. 동양식으로 나는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자 내뱉은 노부부의 첫 말. 정말로 의외였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6살 된 아이를 본 것이다. ‘당신 아이는 괜찮은가?’ 이 첫 마디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왜 난 잊어지지 않을까? ‘괜찮으십니까? 제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의 배려 깊은 질문에 대한 나의 답례는 이것이었다. 노부부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떠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인 송호근 교수가 하버드 대학 유학 시절 저속 운행 중이었지만 그만 앞차를 추돌하는 사고를 냈다. 사고를 낸 원인자가 본인이었기에 송 교수는 적지 않게 염려했는데 그 때에 경험했던 일을 이렇게 책에 소개했다. 오늘 내가 사는 대한민국의 배려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변명과 자기 합리화로 서로를 물고 뜯는 것이 너무 당연해 보인다. 오늘 내가 사는 나라, 많이 아프다. “당신 아이는 괜찮은가?” 우리 대한민국도 이런 멋진 나라가 될 수는 없는 걸까? 그래서 그런가? 나는 요즈음 ‘김제동의 당신의 이야기가 대본입니다.’ 라는 톡투유에 빠져 있다. 따뜻하거든. 6위: 신영복의 ‘담론’ 중에서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조금 더 건강하게 이 땅에 남아 있어서 폭주하는 기관사와 같은 이 세속의 광장에서 그 기관차를 멈추게 하는 어른으로 존재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서 그의 갈파를 뽑았다. ‘성찰’ 의 뜻풀이 가슴 깊이 담는다. 5위: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 중에서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事後) 해석’ 이다. 그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그녀의 말에 본질적으로 지지하는 손을 들고 싶다. 인생의 사후의 해석이며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에 생긴 후에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그녀의 해석에 신선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있다. 무엇인가? 그녀는 그래서 미래에 관심이 없다고 단언했는데 나는 도리어 그래서 미래에 대하여 더 관심이 있다는 점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나는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이것이 더 솔직한 지성에 호소하는 표현이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사후 해석에 대하여도 사실은 무지하다. 해서 어떤 때는 나의 미래에 대하여 부들부들 떨 때가 있다. 동시에 나의 무지 때문에 한없이 초라해 지기까지 할 때가 있다. 정희진이 말한 대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고 해서 사건 이후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내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그녀의 치열한 사유함을 인정하지만 나는 나의 사후의 삶을 나에게 맡길 마음이 전혀 없다. 이후는 간단하다. 나에게는 도무지 내 이성으로는 항거 할 수 없는 내 미래에 대한 삶의 그림자뒤편에서 일어날 일이 이미 주어졌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마디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고린도전서 15:10절 전반절) 너무나도 확실한 사후의 내 삶의 해석도 분명히 이럴 것을 믿기에 나는 나를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치열하려고 공부하고 사유하겠지만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오늘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눈물겹게 알기 때문에. 4위: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터닝 포인트 중에서’ “나의 삶의 터닝 포인트는 매일이다. 매일은 내가 날마다 읽고 있는 모든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윌든’ 의 작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했던 말이 오버랩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면서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순간을 만나는가!” 개척을 하고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운 중에 하나는 그레고리 머과이어와 데이빗 소로우와 같은 감동을 매일 동일하게 받는 것이다. 음악, 커피, 책이 있는 내 서재는 그래서 천국이다. 지성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 3위: 김기석의 ‘인생 교과서, 예수 – 사랑, 먼저 행하고 베풀어라’ 중에서 “구원받은 삶이란 파편화된 삶의 총체성이 회복된 삶이다.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따로 있지 않고, 여기와 거기, 나와 남이 따로 있지 않다. 영원의 반대말은 시간이 아니라 나뉨이고 흩어짐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순간을 영원에 잇댄 채로 살아간다.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다. 따라서 아무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석 목사가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한 글 중에 나오는 말이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인생이 점철(點綴) 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 중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래서 시간과 사람 앞에서 절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새김이 더욱 강하게 밀려오는 나를 만난다. 2위: 김응교의 ‘곁으로’ 중에서 “고통 곁에서 떠나지 않는, 고통 곁으로 다가가는 삶은 ‘값비싼 은혜’ 라고 부른다.”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인 김응교는 자기의 산문집인 ‘곁으로’에서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선언했던 말과 동일한 고백을 했다. 그의 글을 읽다가 조국교회를 뒤돌아보았다. 조국교회는 값비싼 은혜를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값싼 은혜에 내둘려 있는가? 무서운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자꾸만 내가 사랑하는 교회가 이웃의 고통과 함께 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후자의 우리 교회가 있다는 느낌이. 1위: 조헌의 ‘울림’ 중에서 “내 삶이 유언이다.” 규암 김약연 목사가 임종 직전에 자식들에 남긴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한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어낸 수많은 선배들이 이렇게 살다가 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지금 기독교는 존재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나라도 이렇게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오늘을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