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주의 사회에서 절제의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과학 숭배'를 '비신화화' 하고, 일상의 언어를 회복하며, 법적 조치를 해야 한다" (이반 일리히의 절제의 사회에서)
글을 읽다가 '비신화화' 꽂혔다. 신학교에 맨 처음 들어가서 조직신학을 공부할 때 불트만을 만났다. 그가 주장한 인간 본질이 곧 역사화의 결론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아주 짧은 신학적 지식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을 보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신화적인 일체의 것들을 신학화시키는 작업을 해야한다는 '비신화화' 일설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의 일설을 이해하고 나 또한 불트만의 '비신화화'의 개념을 신학적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나름의 산고가 필요했다. 헌데 이반 일리히가 '과학 숭배의 비신화화'를 말하다니! 어찌 이런 도전을 감히 내뱉을 수 있었단 말인가?
접하고 난 뒤에 느낀 소회다. 그래서 이반 일리히는 큰 사람이라고.
과학을 숭배하는 이 시대에 그 과학에 보기좋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 이반 일리히는 현대기술이 관리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절제 사회를 꿈꿨던 큰 사람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목사로 사는 나는 나의 신학과 정신이 있는가? 훗날 누군가에 의해 큰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그런 나만의 사유적 정신이 분명하게 있는가 곱씹어 본다. 큰 사람과의 데이트는 항상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