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비주류
개인적으로 저는 정치를 잘 모르는 문외한입니다. 아니 혹시 정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깊이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칼 바르트의 말대로 신문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기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정치 영역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습득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을 추모해야 하는 슬픔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치적과 공과는 역사가 판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살아생전에 걸었던 정치적인 노선에 어울리는 단어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방송보도에 의하면 그는 '영원한 비주류'였다는 평가가 내려졌고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 만큼은 여야, 진보와 보수 모두 거의가 합의를 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비주류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조직이나 단체 따위의 내부에서 소수파를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비주류는 외로운 것이 당연하고 주류에 의해 외톨박이로 치부됩니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노무현 전직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이런 요인으로 인해 역시 비주류 쪽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전술했듯이 저는 정치에 대하여는 문외한입니다. 그러기에 정치적인 비주류에 대한 이야기를 토론하자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는 목사이기에 목양의 영역에서는 할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일찍이 갈파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라는 말이 한 때 엄청나게 유행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creative minority 가 되어야 함은 성경의 전 역사에서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항상 다수의 전횡과 폭력에 의해 짓밟히는 영적인 비주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항상 외로운 소수였습니다. 이들은 항상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치권력에서 항상 소외되었던 민초들이나 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권력에 의해서 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일련의 영적인 비주류들이 자신들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갔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그들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좁은 길입니다. 비주류의 길을 택하여 가는 자의 삶은 고독의 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주류의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류에게 펼쳐진 눈에 보이는 매력적인 메리트들이 휘황찬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종은 여러 번 주류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유혹을 경험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 접근할 때마다 그곳은 하나님이 없는 철옹성이었습니다. 이것을 늦게나마 알았기에 종은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다짐해 봅니다.
"주여, 영원한 영적 비주류로 살게 하옵소서."지난 한 주간 근래에 경험하지 못했던 눈에 눈물이 많이 고인 한 주간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