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 캘빈 밀러 지음/김인화 옮김 요단/2000년/288쪽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부 영적 전쟁의 본질 적이 점령한 영역 C. S. 루이스는 언젠가, 사람들은 마귀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중 한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귀에 대해 도에 지나친 관심을 쏟거나, 마귀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본서를 접하는 독자를 이 같은 양극단 중 어느 한쪽으로 인도하는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다. 단지 ‘악(evil)'이라는 단어에 d라는 철자를 더하면 ’마귀(devil)'가 된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악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악의 근원은 마귀라고 믿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어두움의 세력과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예외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마귀와의 전투에 임할 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에게 닥친 곤경은 단순한 곤경일 뿐, 마귀로 인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며, 둘째, 자기가 내린 결정은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지도 말고, 또 어떤 일에 성공했다고 해서 천사에게 그 모든 찬사를 돌리는 일 역시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또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 곧 목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종의 옷을 입고 종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세상은 예전에 그리스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악한 세력이 모든 희망을 살라버리려 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의 한가운데 살며, 꺼져버린 희망의 불씨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되살릴 기회를 바라며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 12) 아무리 연약해 보이는 성도라도 일단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사단은 두려워서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또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고 그분의 전신갑주로 완전 무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악의 세계와 싸우라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말씀의 검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곱씹으며 땅으로 떨어진 사단을 쓸데없이 두려워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구원의 확신에 찬 우리에게는 그 어떤 협박이나 위협도 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이미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한 존재이다. 그리고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은 우리의 몫이지만, 전투에서 승리해야 하는 책임은 그분의 것이다. 그러니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하자. 천사의 분노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요한계시록 12: 12) 베트남전에 참전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는 정신적으로 아주 심한 손상을 입고 돌아왔다. 외상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정서적으로 입은 상처가 너무나 깊어, 육체적으로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던지, 그는 자신이 목격한 잔혹한 광경이 뇌리를 스칠 때마다 거의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 있거나 자기 방에만 처박혀서 지내곤 했다. 그의 삶은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소름끼치는 일들로 온통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그는 화들짝 놀라 자신만의 어두운 공상 세계 속으로 칩거해 들어가서는 몇 시간이고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단절하곤 했다. 그의 내면세계에서는 여전히 베트남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 전투는 그가 하루에 한 번 이기기에도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이러한 내면의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이 비단 그뿐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싸움을 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할 것이다. 공포는 실재한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어둡고 무서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며 갑작스레 저돌적으로 덤벼들어서는 몸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비슷한 깊고 쓰라린 상처를 남긴다. 이러한 작고 사적인 전투들은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이라는 보다 큰 전쟁에서 파생한다. 사단은 하나님께 맞서서 자신을 높인 죄로 천국에서 추방되었다. 그가 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를 증오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그가 원하지도 않는 사랑의 관계 안에 억지로라도 머무르라고 강요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종종 ‘거룩한 분노’라고도 불리는 하나님의 분노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신으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한 데서 나오는 값싼 일시적 변덕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원한이나 앙심의 표출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의로운 분노이며 부정한 잘못에 대해 보이는 거룩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다. 그분은 사단조차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하셨으며, 그 타락한 대천사가 자신이 천국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된 잘못된 선택들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거룩한 실망으로 마음 아파하시며, 반역 상태에 있는 자들을 다시 자신에게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절절하게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작은 더러움도 허락지 않을 정도로 정결하고 거룩하신 분이며, 그것은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화염이 불타는 지옥은 오히려 사단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피해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거주지로 택한 곳이다. 그 곳은 고통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다는 것 자체가 화염과 유황으로 불타는 듯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누구일까? 마귀는 자신의 주인이 천국에서 추방되자 그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들이다. 다시 말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루시퍼와 함께 천국에서 제명된 천사들이 바로 마귀인 것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 중 삼 분의 일은 자신이 사단과 함께 추방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타락한 천사들도 막상 천국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어떻게 하면 자신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가룟 유다처럼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다가 배출구를 찾지 못해 속에서 곪아버리는 영적 죄책감을 갖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됐으며, 더구나 그분께 용서를 구할 수도 없게 됐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마 27: 3-10).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 방법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한 횟수만큼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다시금 예수님께로 회복되는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은 언제나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로 귀착된다. 곧 베드로처럼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게 되든지, 아니면 유다처럼 돌이킬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 철저한 고독 속에 갇히게 되든지 둘 중 하나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사단을 섬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가책으로 인해 유다가 맞았던 것과 같은 종말을 맞을 필요는 없다. 사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는 악의에 대해 모호한 개념들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악을 단순히 철학적으로 의인화시킨다고 해서 설명되지도 않는다. 아마도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설명은 성경에 나오는 대로, 배로 바닥을 기는 상처투성이의 뱀일 것이다. 그의 분노는 인간적인 환경 안에서는 전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요한계시록 13: 5, 7)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르완다 부룬디에서 있었던 잔혹한 대량학살 사건,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된 반공주의자 숙청 사건, 스탈린이 취한 공포의 집단화 정책, 이 모든 사건들은 단순히 전쟁영화나 이념영화의 소재라기보다는 사단의 분노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단이 그 분노를 얼마나 광대하게 표출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이같이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면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일들 가운데는 뾰족히 설명할 길이 없는 것들이 많다. 어느 사제의 머리에 무려 여덟 개나 되는 대못을 박아 넣은 것도 그렇고, 기도 중이던 일곱 소년과 그들의 선생에게 저지른 악행도 그렇다. 어느 교회에서 한 선생이 일곱 소년들을 데리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병사들이 그 교회에 들이닥쳐서는 총검으로 선생의 혀를 잘라낸 다음, 일곱 소년의 귀에다 젓가락을 쑤셔 박았다. 당신이라면 이 같은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러한 잔인한 행위나 자신이 야기한 고통을 보며 즐거워하는 잔혹성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결국은 마귀와 그들의 거주지인 지옥이 그 저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제도 속에 나타난 마귀의 위력이 가공할 만하다는 관점에서 그들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 마귀들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일까? 프란츠 힌켈라메르트는 정부와 기관들이 인간을 단순한 사물로 전락시켜 인간성을 말살한 다음, 그 자리를 경제나 권력의 남용으로 대체시켜 버림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인간의 “사물과 과정”이라고 불렀다. 인간성 박탈로 야기되는 비참함이 얼마나 큰 지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랑이 천국에서 내려오듯, 편견은 지옥에서 올라온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 촌락에는 하늘로 좇아 불을 내리게 하자고 예수님께 권유했을 때,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심하게 꾸짖으신 것도 아마 이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증오심을 강화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의 거룩하지 않은 소망은 전적으로 마귀적인 것이라고 단호하게 질책하셨다.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인을 멸망시켜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들이 사마리아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성령님이 바라시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사물화하는 것은 마귀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었다(눅 9: 51-56). 헬라어에는 분노를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로마서 2:8에 나오는 투모스(thumos)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orge)이다. 전자가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비이성적인 사단과 인간의 분노를 일컫는 것이라면, 후자는 악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이시는 변치 않는 분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단을 향해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언제나 용서해 주기만 하실 거라고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손주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매번 묵인해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같으신 분이 결코 아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 3-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 1-2) 우리를 죄로 끌어들이는 사단을 하나님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단은 이미 심판을 받아 천국에서 쫓겨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게 12: 12, 사 14: 12 이하).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이 모든 권세 가진 적을 완전하게 제해 버리셨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인 사단은 하나님의 휘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구세주를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모든 인간의 휘하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 7)고 권면하기도 했다. 사단을 무시무시한 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하면서도 사단의 존재는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성경 전체에서 무신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부분은 시편 단 한 군데뿐인데, 시편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 1)라고 말함으로써 무신론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부인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이 사단을 부인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을 의심하는 영혼은 사단의 수중에 쉽게 들어가 버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공포에 그들이 굴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하나님처럼 너무나 큰 존재를 의심하기보다는 그보다 작은 사단이라는 존재를 믿는 것이 더 안전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한일서 4: 1-3) 사단을 정복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요즈음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상당히 보편화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능력과 군대 마귀를 명하여 나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 실제와는 거리가 먼 사탕발림일 수도 있다. 존 맥아더는 우리 자신이 가진 영적 힘에 너무 매료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그렇게 되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체험하는 영성’을 기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희망을 품기보다 놀라운 표적과 기사만을 보기 바란다면, 마귀에게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적 증거보다 영적 경험에 더 집착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감동시키려면, 감탄사가 터지게 하는 빈도나 강도가 꾸준히 상향곡선을 그리도록 해야 하며, 이처럼 체험 본위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내 마귀가 당신 마귀보다 훨씬 크고 막강하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 7)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 4)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만큼은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사단과의 싸움에 임하기 전에 사단을 정복할 전략을 치밀하게 세워야 한다. (2) 모든 유혹의 저변에는 우리의 자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라. (3) 우리에게 주께 자백하지 않은 은밀한 죄가 있다면, 그것은 사단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4) 사단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우리를 유혹하려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5)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키기 원하시는 창조주이신 것처럼, 사단은 우리의 모든 것을 허물어버리고 싶어하는 파괴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 승리의 소문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 13, 15) 성경에서 사단은 자신의 패배로 인해 힘이 약해지게 된 적의 모습으로만 존재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천국에서 쫓겨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에게는 쇠사슬에 결박된 채 아무런 희망 없이 영원히 지내야 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계 20: 2, 10) 믿음 그 자체를 정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적이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 있다는 것 또한 정확하게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믿음이 필수적인 요건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현재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이 아무리 심각하고 힘들게 보여도 결국은 잠깐 동안 그러다 말 순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믿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기록 과정도 끝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악마에게 너무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된 나머지,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가진 존재로 그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패무적의 프랑켄슈타인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에 깊이 매료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방법은 기이한 현상보다는 보통 평범한 우리 인간들의 관계를 통해서 악을 퍼뜨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미리 우리의 미래를 알아보고자 하는 조바심에 못 이겨, 하나님이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스스로 캐내어 알려고 할 때마다, 꼭 우리 곁에 다가와서는 유리구슬이나 손금으로 운세를 점치는 사람들 또는 영매 등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하려 한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는 것을 사단으로부터 알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故) 파이크 주교는 주교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정녀 탄생설이나 부활 같은 중요한 성경적 교리들을 벗어던져 버렸다. 그러다가 아들 짐이 자살한 후부터는 강신술을 하는 이상한 모임에 깊이 빠져 날마다 죽은 아들의 영과 접촉하려는 시도를 했다. 아들이 자살한 데 대한 무거운 죄책감으로 항상 괴로워하던 그를, 어느 날 한 캐나다인 영매가 드디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영과 접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세상의 반대편’에서 발부된 영적 면죄부를 받은 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강신술사들이나 영매들과 접촉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에게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던 그는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좀더 깊은 영적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이스라엘로 갔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그때 그는 자기 안에 깊이 갇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도 무언가에 홀린 듯하고 아주 먼 곳에 있는 듯 현실과 격리된 생활을 하던 그는 결국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사막 한가운데서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겨우 속옷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으신 것을 캐내려고 하다가 그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서 목숨을 잃는 비운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파이크 주교가 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가 승리하였으므로 자신도 이미 승리하였다는 진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한 “승리의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지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는 힘이 그에게는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했던 것이다. 파이크 주교의 죽음은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승리가 아무런 힘을 발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치러야 할 영적 전쟁에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우리가 그를 정복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전술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우리는 적의 실체를 규명하여 그 이름을 밝힐 것이고, (2) 감추어진 것과 신비주의적인 것은 배척하고 그 대신 밝게 계시된 것은 선호할 것이며, (3)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요, 우리를 정결케 하신 이로 받아들인 것처럼, 승리에 대한 소문 또한 온전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바울은 적의 실체와 이름을 에베소서 1: 21에서 네 가지 헬라어로 명명하였는데, 토마스 화이트는 그 말을 인용하여 이 같은 마귀적인 권세들의 실체를 좀더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그들을 지옥의 공동 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그의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바울은 권세들이 지배자 또는 정사(알카이), 권세(엑소우시아), 능력(두나미스), 그리고 악한 영의 세력(코스모크라토라스)이라는 일종의 계급제도로 조직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에 언급된 권력 구조는 상위계급에서 하위계급으로 내려오는 식으로 나열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선 알카이에 대해 살펴보면, 그가 세상의 모든 열방을 지배하는, 사단 중에서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왕과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단 10: 13, 20). 다음으로 엑소우시아는 초자연적이면서도 자연적인 통치를 하는 계급을 의미하는데, 바울 사도는 인간이 만든 모든 조직의 이면에는 이 초자연적인 힘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인간의 제반사를 중재할 수 있는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우주적인 존재에 대해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계시적인 관념을 표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추측컨대 두나미스는 국가와 문화 내에서 삶의 몇몇 특정 국면에 영향을 끼치는 작용을 하는 것 같고 마지막으로 코스모크라토라스는 인류를 괴롭히는 다양한 형태의 악령들, 이를테면 기만하게 하고 욕정에 불타게 하고 반역을 일삼게 하고 두려움과 허약함으로 떨게 하고 점을 치고자 하는 충동을 유발시키는 그 모든 악령들을 일컫는다. 이상에서 말한 네 가지 악의 권세들은 모두 대적하여 쫓아내 버려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적의 실체를 규명하고 그 이름을 밝히는 행위에는, 마귀가 우리 삶에 슬그머니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를 원천 봉쇄하는 힘이 있다(엡 4: 27). 적의 규모를 알고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은 구원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천하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점을 알고 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한 마음으로 확신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릴 것이다(살전 5: 22). 어두움은 악이 주관하는 곳이다. 그리고 마귀는 자신의 정체를 절대로 밝히지 않는다. 그 권세는 어두움 속에서만,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그 위력을 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어두움의 주관자(엡 6: 12)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실제로도 예수님은 자신을 빛이라고 부르셨으며(요 12: 46),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빛의 아들들이라고 했다(살전 5: 5).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가장 온전하게 계시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감추어진 것을 드리우고 있는 휘장을 열어 젖히는 수고만 하면 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빛이 사단이 감추고 있는 것을 밝게 비추도록 하자. 그분의 빛은 이 세상과 우리 속에 있는 어두움을 물리쳐 줄 것이다. 신비주의(점술인에게 점을 보는 것, 강신술, 마녀, 손금 읽는 것, 위자보드, 블랑세트, 점성술 등)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인 하나님과는 결코 필적할 수 없는 사단의 사상인 것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킨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이사야 14: 12, 16) 우리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리라는 것과 맞물려 있는 또 하나의 소문이 있는데, 그것은 곧 사단이 패배하리라는 소문이다. 우리를 파괴시켜 버리겠다고 하는 사단의 위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하늘을 우러러보고 “다 이루었다”(요 19: 30)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이미 그 힘을 상실하였다. 이 말씀은 우리의 적이 영원히 천국 바깥에 거할 수밖에 없도록 굳건하게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하였다. 사단이 패배하리라는 소문은 이 세상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 지 이미 오래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며,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은혜이다. “나와 절친하게 지내는 전도자가 한 명 있는데, 그는 난폭한데다 알코올중독 증세까지 보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이 친구의 남동생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남동생은 아버지가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자기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기도를 올렸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기도를 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동생은 광란의 질주를 하던 차에 치어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되었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던 아버지는 드디어 예수님께 의지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그 아버지를 묶고 있던 사단의 올가미는 아들을 잃는 크나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풀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 29-30)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마지막 날 우리가 아버지의 임재 안에서 누리게 될 최종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미래의 일이 되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벌써 그 효력을 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사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단을 앞으로 정복해야 할 존재로 보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가 이미 오래 전에 정복당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미가엘의 발은 이미 사단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검은 이미 높이 들어올려졌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바로 그 순간에 최종적인 승리를 획득하였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최종적인 승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중간 중간에 치르게 될 사소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은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 12-14) 이와 같이 사람이 사단을 섬기는 모든 기괴한 작태들은 아마도 세상을 한 손에 움켜쥘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사람들은 세상 속으로 진격해 들어가 그것을 수중에 넣을 수만 있다면, 자기를 파는 위험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유사 이래로 돈, 섹스, 권력이라는 세 가지 욕망의 포로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세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너무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은혜라는 빛이 그 앞에서는 거의 무색해질 정도로 말이다. 사단은 유리한 거래로 우리를 현혹하는 명수다. 지옥은 사단과 유리한 거래를 하느라 평생을 허비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한 가지씩 사단과 거래를 할 때마다, 그들의 영혼은 조금씩 그에게 속박되어 간다. 그러다가 결국은 영혼을 담보로 하는 거래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단순히 성공가도를 달리고만 있다고 생각하며 흡족해하는 그들 앞에 어느 순간 사단이 나타나서는 영혼을 가져가야겠다고 요구하는 것만큼 아이러니컬한 장면도 드물 것이다. 영생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갈망하면 현세의 생명과 내세의 생명 둘 다를 소유하게 되지만, 사단과의 거래에 집착하게 되면 둘 다 잃어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승리의 소문을 믿는 것만이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확신과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