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복상 198호) - 펌 글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헨리 나웬과 더불어 C. S. 루이스가 널리 읽혔다. 원래 미국 복음주의 계열에서 애호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물론 홍성사를 통해 신뢰할 만한 번역들이 나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1). 그런데 나웬이 그러하듯이 루이스 또한 복음주의자는 아니다. 루이스 당사자가 복음주의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자자의 루이스 애호는 일종의 짝사랑이다. 루이스가 복음주의권에서 읽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 | | | | ▲ <시편사색> (홍성사) | | | 특별히 루이스의 성서 해석이 탁월해서인 것 같지는 않다. <시편 사색>(홍성사)을 보라. 그는 시편에 나타난 교차대구법을 평행법으로 잘못 읽고 있다(10~1쪽, 이 문제에 대한 해설로는, 트렘퍼 롱맨의 <어떻게 시편을 읽을 것인가>(IVP)를 추천한다). 루이스의 성서관이 복음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루이스는 자유주의로부터 거리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영국적 의미의- 근본주의와 동일시하지도 않았다(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일종의 신화로서 성서를 대했다. 더욱이 루이스는 남성적이었다. 그의 삶이, 그의 기질이, 그의 신학이, 그리고 아마도 어느 정도는 그의 결혼도 그러했다. 그는 조이의 남성적 미덕을 찬양하기도 했다(<헤아려 본 슬픔>(홍성사), 73쪽)! 분명 조이와의 사랑에 영향을 깊게 받은 <네 가지 사랑>(홍성사)을 봐도, 남성적 우정이 중심에 놓여있다. 더욱이 그에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남성적이었다. 이 점에 관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 | | | | ▲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 | |
그렇다면 무엇? 루이스가 기본적으로 전통을 중요하게 여긴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루이스는 현대 기독교의 대표적 변증가이다. 사실 그가 새로운 것을 말했다면, 복음주의가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 지도 의문이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홍성사)를 따르면, “‘자신이’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자신’의 호오(好惡)와 상관없이 이미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한 기독교를 설명하”는 것에서 자신의 소임을 찾았다(11쪽). 유려한 문체에 감싸인 그의 총명함은, 창조성보다는 정통성에 중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정통성을 변증하는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다. 그가 만들어낸 활기찬 언어는 기독교의 정수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단순한 선포에 익숙한 복음주의 계열에서 그를 좋아할 만 하다. 그러나 짝사랑이란 것이 대체로 그렇듯이 다분히 임의적인 수용이며, 해석이다. 복음주의는 루이스가 보여주는 순수한 기독교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지 않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스스로 “교회가 일치해야 할 이유만큼은 분명히 보여 주었다고 생각”했다(14쪽).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작업이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가톨릭 계통에서 공히 인정될 만 한 것이기를 바랬다(13쪽). 즉 순전한 기독교, 역사적 기독교, 기독교의 정수를 소개하는 것이 이 책과 나아가 그의 여타 기독교 서적 집필의 목적인 것이다. 그 목적을 둘러싸고 그가 부각시키는 항목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 | | | | ▲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 | | |
가령 <순전한 기독교>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와 함께 가장 많이 읽혔지만, 다시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물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탁월한 경건문학일 뿐 아니라 쉽게 읽히는 평이한 형식으로 쓰여 있다). 이 책에서 특별히 신학의 본질에 대한 해설을 주목하라. 신학을 “지도”로 묘사하는 그의 혜지(241쪽)는 보수 교회가 특히 귀 기울여야 한다. 어떤 신학이건 하나님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잘못된 신학이다. 기본적으로 신학은 특정 시기 공동체가 일정 정도 공유하는 하나님 체험을 축약한 것이다. 따라서 그 최소한 기질과 환경상 그 신학과 맞아떨어지는 이들은 그 신학을 통해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지침을 얻게 된다. 눈 밝은 이는 지금 나의 언급에서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유주의 신학의 독점적 통찰이 아니라고 확언한다. 신학과 영성을 갈라버린 것은 대체로 보수교회의 잘못이다(주-2). 루이스의 신앙적 자서전인 <예기치 않은 기쁨>(홍성사)이나 기독교 변증서인 <고통의 문제>(홍성사)에서 두드러지는 주목할 만한 신학적 통찰은 기쁨(Joy) 개념이다. 간접적으로 경험되는 초월과 영원,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 즉 일종의 욕망(주-3)이다. 이러한 기쁨의 경험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주는 매개의 기능을 수행한다(<고통의 문제>, 225~7쪽). 이에는 숭고한 자연이나 황홀한 신화, 애틋한 사랑 등 모든 것이 포함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찰나적인 경험(kairos)이다. 복음주의자는 내재 속에 초월이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루이스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 | | | | ▲ <고통의 문제>(홍성사) | | | 다음으로 내세에 대한 루이스의 전망을 강조하고 싶다. 전통적인 예정설에서 부담을 느끼는 이들은 루이스의 입장에서 무언가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내세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로 특징지어진다.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고통의 문제>, 194쪽) 이는 기본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내세관과 유사하다. 루이스 자신은 일종의 영매라고 보아 배척했지만(<천국과 지옥의 이혼>), 그의 책을 직접 읽어봤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나 <고통의 문제> 등에서 자기 부인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이란 하나님이 채우시는 빈 구멍”이며,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은 …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드림”이다(<고통의 문제>, 234~5쪽). 자아의 개방과 양도는 단회적 선택이 아니라 과정이며, 이는 계속 우리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주 앞에 굽혀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내세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루이스의 통찰은 우리의 현세와 내세가 단절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회적 회심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에게 중요한 교훈이다.
| | | | | ▲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홍성사) | | | 루이스의 마지막 시기 작품은 어떠한가? 책 이전에 관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이와의 만남은 말년에 내놓은 그의 저작들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했다. 먼저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홍성사)라는 마지막 소설을 다뤄야할 것이다. 우리는 통상 루이스의 문학이라고 하면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린다. 이 연작동화는 확실히 훌륭한 기독교 교육 자료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르침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 나로 하여금 작품성을 높이 평가하는 데에는 다소 주저하게 만든다. 물론 마이클 워드가 지적한 점성술적 차원처럼 숨겨진 구도를 인정하지만(<복음과상황> 2007년 3월호 114~5쪽), 각권의 중심 메시지와 세부적 교훈은 기본적으로 표면에 노출되어있다(주-3). 조지 세이어는 <나니아 연대기>의 간단한 성격묘사를 칭찬하지만, 그것은 동화이기 때문에 용납될 뿐이다(341쪽).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비교하면 이 한계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나니아 연대기>의 명백한 한계를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돌파했다. 영미권에서 얼마나 팔렸는지가 중요하지 않다(영어권의 경우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피상적이기는 매한가지다). 단언하건데 루이스의 소설 중에 가장 탁월하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기독교적 외양에 집착하지 않고도 그가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진정한 판타지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 | | | | ▲ <네 가지 사랑>(홍성사) | | |
그런데 이 작품을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4년 뒤에 나온 <네 가지 사랑>을 읽어야 한다. <네 가지 사랑>은 두 가지 초점을 가지고 있는 타원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 면으로 우정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다른 한 면으로 자비(agape)에 과녁을 맞추고 있다. 후자는 결국 모든 인간적 사랑의 이면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전자, 즉 우정에 두는 그의 무게중심이다. 인간의 사랑의 정점은 자연적 순리를 넘어서는 우정이라고 보는 그의 입장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만일 루이스가 조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네 가지 사랑>에서 우리는 훨씬 불균형한 서술을 접하게 됐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이는 두 작품은 명백히 조이와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가령 결코 미인이라 할 수 없는 조이의 성격 묘사를 오루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는 그녀와의 공동 작업이라 할 수 있다(<루이스와 잭>, 389~390쪽). 사랑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조이가 없으면, 루이스의 영성은 그토록 심화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녀는 분명 루이스를 놀라게 하는 기쁨이었다. 사별(死別)을 통해서조차 그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말년에 그의 기력이 쇠하였지만, 영성은 그런 외양으로 평가될 수 없다). <헤아려 본 슬픔>을 포함한 말년의 세 저작은 루이스 작품의 절정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헤아려본 슬픔>을 보라.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루이스의 영성은 경지에 도달했다. 탁월한 상상력으로 사고 실험을 하던 <고통>의 작가와 아내를 사별하고 몸부림치는 <헤아려본 슬픔>의 작가 사이에는 큰 간극이 놓여있다. 그의 신정론(神正論)적 믿음은 이제 진흙탕 속에서의 증명을 요구받게 되었다. 암중모색의 과정을 거쳐 그는 결국 증명해냈다. 그는 슬픔을 상태가 아닌 과정이라고 말한다(87쪽). 아마 그의 신앙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신앙이 어떻게 머리의 믿음에서 가슴의 믿음으로 옮겨가는지를 보게 된다. 이제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101쪽)은 젊은 기독인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결코 같지 않다. 물론 여전히 미문(美文)이다. 신을 원망하는 언어조차 아름답다. 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원망하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운 표현으로 인해 이 글을 음미하시리라고 믿는다. <헤아려 본 슬픔>을 통해 복음주의가 배워야할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영성은 투명한 정직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복음주의권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포는 통상 공허한 외침이기 일쑤이다. 가슴의 하나님상과 머리의 하나님상이 따로 놀고 있다. 윤리적 사안도 역시 그러하다. 복음주의는 너무 쉽게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취하려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 종종 그러하듯이 이는 위선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메들린 렝글은 루이스가 하나님에게 대들 용기가 있었음에 감사하고 있지만(13쪽), 나는 생각이 다르다. 기독교 변증가가 앞서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특별히 고마워해야하는가? 이미 예수님이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항의하며 보여준 모범으로 부족한가? 내 생각에 신 앞에 솔직하고자 하는 용기는 모든 기독인에게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용기를 찾기가 어렵다. 복음주의자는 신념의 정확함보다 마음의 정직함이야말로 하나님이 흠향하실 제물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만일 복음주의자가 루이스에게서 진정으로 배우길 원한다면, 교리에 대한 세련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것들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제 자리에 멈춰있게 될 것이다. ----------------- 주-1 루이스의 상상력이 잘 발현되는 것은, 신학 작업의 진행 과정과 문체를 통한 표현에서이다. 후자와 관련하여 번역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게 부각된다. 루이스의 기독교 관련 저작은 국내에 대부분 소개되었지만 가톨릭 측에서 번역된 일부 저작을 제외하면, 그다지 신뢰할 만한 번역들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몇 년 사이에 홍성사 측에서 나온 정본들은 일관되게 신뢰할 만한 번역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수다한 예를 통해 드러나듯이 정식 계약이 번역의 질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면에서 이는 높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주-2 보수권의 경우, 신학과 영성을 결합시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20세기만 해도 이를 보여주는 브루스 밀른과 제임스 패커 정도가 고작이었다. 반면 자유주의의 경우는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시작하여 체험의 영역에서 신학을 접근하는 것이 하나의 준거 틀로 고정되었다.
주-3 이 시리즈는 명백히 조직신학적 틀을 가지고 있다. 첫 권인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구원론을 다루고, 바로 다음권인 <카스피안 왕자>는 창조론을 다루며(창조가 구속 다음에 배치된 것은 대단히 시사적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종말론(<마지막 전투>)으로 끝난다. 나머지 책들이 각각 어떤 측면에 주목하는 지를 파악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아슬란이 일곱 권을 묶어주는 중심이라는 점(<루이스와 잭>(홍성사, 333쪽)은 기독론적 모티브가 이 동화를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