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체인가? 대상인가? 본문: 사사기 1:4-8 하나님은 아직도 미완성을 남아 있는 가나안을 완전히 점령하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유력한 지파였던 유다 지파에게 가나안에 올라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하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온 지파를 부추겨서 가나안으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본문은 또 다른 유다 지파의 치명적 불신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을 한 유다지파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넘겨주셔서 대승하게 하셨습니다.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루살렘 근교로 추측되는 베섹을 통치하고 있었던 아도니베섹을 사로잡고, 10,000명의 군사를 전멸시키는 혁혁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약속을 불순종한 유다 지파에게 허락하셨건만, 유감스럽게도 유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하나님께 또 다른 죄악을 자행하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6-7절을 봅니다.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해석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부였던 예루살렘은 아직은 가나안인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전략적으로 이 지역은 어떤 의미로 볼 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성읍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남북의 요충지이면서 전 이스라엘을 한 눈으로 내다볼 수 있는 정치적인 요새였습니다. 이 요새와 같은 예루살렘에서 얼마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었던 베섹의 패권을 잡고 있었던 통치자가 아도니 베섹입니다.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본문 7절에서 이 왕은 이전에 70명의 왕을 죽이고 70개의 나라를 정복한 왕이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정복을 할 때마다 사로잡은 상대방의 왕들을 처리할 때 쓰던 방법이 그 왕들의 엄지발가락과 엄지손가락을 절단하여 다시는 칼을 잡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게 수모를 준 뒤에는 자기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강제로 먹이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택합니다. 아도니베섹의 이 방법은 가나안의 전통적인 풍습으로 전쟁 이후에 관례화가 됩니다. 주목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가나안의 제도가 된 잔인한 방법을 유다가 사로잡은 아도니 베섹에게 행했다는 말입니다. 아주 똑같이. 결국 그렇게 잔인한 방법을 아도니베섹에게 행한 뒤 그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와서 그곳에서 제 2차 감염으로 죽게 하였음을 본문 사사기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해석을 통해 저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 하나님의 백성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지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하여 앞으로 가나안을 점령하면 그 가나안의 풍습이나 종교나 문화를 따르지 말고 그들에게 동화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가나안을 점령하는 어간, 하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가나안화(Canaanization)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음을 본문 아도니베섹 사건을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경계하고 또 경계하셨던 가나안화라는 비극의 서막이 본문을 통해 열리고 있었다는 말ㅇ비니다. 오늘 제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비롯하여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던져지는 세상이 던지는 비아냥이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필자는 섬기는 교회의 홈페이지에 목사 인사말로 담은 내용 중에 이런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비극적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자존감이 있는 교회가 됩시다.” 잘 나서가 아닙니다. 건방져서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무엇이 특별한 것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가장 정직한 언어와 삶에 밑줄 긋고 말한 대로 살아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어야지 세상으로부터 변화될 대상으로 비판당하고 추락해서야 되겠습니까? 교회가 가나안화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 에서 했던 말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가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치인 변화의 주체로 사는 것, 교회와 성도가 할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