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향 신문을 애독한다. 며칠 전, 생명평화마을 대표로 있는 황대권 선생이 기고한 ‘샤머니즘을 욕되게 하지 말라’ 라는 칼럼을 읽으면서 현직 목사이기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의미 있게 그의 글에 집중했던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헌데 공교롭게 jtbc 뉴스 룸에서 방송되고 있는 앵커 브리핑에서 손석희씨가 이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공감의 배를 탄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생명평화마을 대표의 논거를 요약하면 이렇다. 박대통령의 종교적 엽기 행각은 근래 수많은 사람들이 가뜩이나 종교라는 영역에서 대하여 부정적 색안경을 끼고 혀를 내두르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마치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소위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말에 관계된 일체의 언어들이 마치 상종하지 못하는 것들로 인식되는 바람에 그 중에도 미신 취급을 당하고 있는 샤머니즘은 고립무원에 빠진 넉 다운 상태임을 아쉬워했다는 점이다. 그의 글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이 나라는(북한 포함) 태고 이래로 지금까지 한 번도 샤머니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지금도 가장 강력한 종교 또는 신앙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격증 따기가 쉬운 개신교의 목회자가 13만 명인 데 비해 무당의 수는 2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방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샤머니즘은 한국인의 기저신앙(基底信仰)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샤머니즘을 빙자하여 온갖 악행과 기행을 일삼는 무리들이다.” 손석희씨는 앵커 브리핑에서 ‘부끄러운 것은 샤머니즘을 빙자하여 온갖 악행과 기행을 일삼는 무리들이다.’에 천착하였는데 나는 ‘상대적으로 자격증을 따기기 쉬운 개신교 목회자’ 라는 그의 글 면전에서 몹시 수치스러웠다. 수치스럽다 못해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 얼마나 개신교 목사를 깔보았으면 그가 이렇게 표현했나 싶어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어찌 하랴! 다 자업자득인데. 그의 글을 읽다가 나도 누군가처럼 이렇게 표현해 보고 싶었다.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나 싶어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분노와 아픔이 겹쳐져 그것을 표현하다보니 글의 흐름이 비껴나간 것 같다. 정신 차리고 다시 본 궤도로 돌아가고자 한다. 샤머니즘에서 출발하지 않는 종교가 어디 있나? 를 항변하는 황선생의 글에 다른 토를 달자면 여러 날개 짓을 할 수 있겠지만 폭넓은 마음으로 그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이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소수 ‘갑’에 해당되는 자들의 ‘질’를 비판하고자 한 점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만두기로 한다. 다만 오늘 이 글을 쓰는 나의 의도는 ‘야만과 야생’을 동일시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경계하고자 함이다. 어제 미국 대선이 막을 내렸다.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인 트럼프의 승리였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커버스토리로 남긴 영어 문장은 어떤 면에서 보면 애교스럽다. “Trump triumphs”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평양 너머에 있는 한 다른 나라의 대통령 선거가 마치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일처럼 왁자지껄할 수 밖에 나의 처지가 왜소해 보여 몹시 초라하지만, 그 나라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국익과 심지어는 존망의 운명까지 달려 있다고 하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내심 우리나라를 위해 그래도 언론이 말한 그대로 최악(最惡)이 아닌 차악(次惡)이라도 되기를 바랐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약소민족 국민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소아적 심리를 드러낸 것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 같다. 허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차악이 아닌 최악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여론은 줄곧 ‘아웃사이더’라고 지칭했다.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가 걸었던 길이 도발적이고, 예측 불가능의 기질을 갖고 있고, 항상 독선적이고 엽기적인 그 무엇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이번에 당선 될 수 있었던 슬로건은 ‘아메리카니즘’ 이었다. 직역하면 ‘미국주의’ 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자국우선주의’ 라는 의역으로의 번역이 더 선명한 그의 위험성을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그는 철저한 미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유세 기간 내내 선언하고 다녔다. 그의 이 발상들이 우리나라 범생이들로 하여금 그가 당선되는 것이 충격이요,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기저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아웃사이더’ 라는 말에 대하여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웃사이더라는 단어가 그렇게 번역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_ISM 적인 사고방식이 전형적인 야만적 사고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 말이다. 그가 행한 일들, 그리고 그가 진행하고자 하는 앞으로의 일들은 예상건대 야만적이다. 약자를 야만으로 보는 그의 시각이 야만이다. 여성을 야만적으로 폄훼하는 그의 사고가 야만적이다. 부동산 재벌인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부를 이어받은 금수저인 그가 하루에 1달러로 연명하는 지구상의 훍수저들을 이해할 리 만무이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들을 향한 그의 사고들은 야만적이다. 글을 쓰는 필자는 지금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자 파리 대학 고등연구원으로 재직한 세계적인 석학인 레비-스트로스가 쓴 ‘La Pensee Sauvage’ (야생의 사고) 를 읽고 있다. 워낙 전문적인 분야의 책이고 내용 자체가 방대하여 쉽지 않은 독서 여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레비는 자신의 책에서 서구 문명이 지칭하고 있는 야생의 사람들 (대체적으로 제 삼 세계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말함)을 추적하면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사고나 사물에 대한 고유 언어 매김 등을 고찰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음을 여러 차례 밝힌다. 그들의 놀라우리만큼 섬세한 언의 세밀함과 이 땅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토템 신앙과 샤먼적인 사상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어 그들이 품격이 너무나 대단하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레비는 그들의 신비한 삶을 알면 알수록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샤먼은 인간 사고의 보편적인 특질을 나타나고 있고, 더불어 미개인이라고 서구에서 말도 안 되게 정의하고 있는 판을 반드시 뒤집어 놓아야 함을 지성적 양심을 갖고 역설한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나는 ‘야만적 사고’를 갖고 있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레비가 소개하고 있는 서구인들이 만들어 놓은 미개인들이라고 지칭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야생적 사고’가 동일시될까 무척이나 염려스럽다. 졸필이지만 제가 펴낸 책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엘리 위젤의 의미 있는 소설 ‘팔티엘의 비망록’에서 아들 그리샤가 아버지 팔티엘 거쇼노비치에게 어려서 배운 것을 독백하는 내용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공산주의자들) 볼세비즘, 멘세비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란 세 단어를 배웠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의(_ism)’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그건 혼인할 준비를 하고 있는 변덕스러운 여자 같은 거란다. 앞의 단어에 따라가는 거란다.” 전율할 만한 기막힌 통찰이지 않은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도리어 사랑함과 자유함이라는 야생적 실천이다. 야만과 야생을 감히 동일시하지 말라! 그건 죄악이다. 야만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땅에서 야생의 사고들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