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살아내기’ 를 거부하는 시대 본문: 사사기 1:1-3 몇 년 전, 두 권의 책을 접했습니다. 하나는 스웨덴 출신의 사회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 이고, 또 하나는 미국 출신의 의사인 말론 모건이 쓴 ‘무탄트 메시지’입니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난 뒤의 소회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감동과 기쁨이었습니다. 티베트 고원의 가난한 그러나 너무나 행복한 땅 ‘라다크’ 사람들로부터 배운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움으로 살아내는 행복을 기록한 전자의 책과 안락한 미국의 상류 계층의 신분인 의사로서 살다가 어느 날 경험한 호주의 원주민인 ‘무탄트’ 사람들과 동행했던 짧은 여행을 통해 도저히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기의 감동을 적어 놓은 후자를 접하고 나서 저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살아내기’였습니다. 물질문명에 빌붙지 않고 조상으로 물려받은 척박한 생활환경 속에서도 그들 본연의 인간됨이라는 본질에 흐트러짐이 없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내는 저들의 삶 속에서 너무나 현대화되고 상품화된 내 이기적 타성에 젖어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많은 반성의 시기를 가졌던 일을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도전하고 있는 정체성의 질문입니다.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혹은 학문적인 배경에 따라 다양한 답들이 제시될 수 있는 물음이지만 아주 단순하게 제 스스로 접근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주군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신 권면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전술했듯이 신-사사 시대입니다. 사사시대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들의 소견이 옳다고 믿은 것을 그대로 관철시켰던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 -사사시대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특별계시로 오늘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대로의 삶 살아내기를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기를 거부하는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신-사사시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을 주목해 보십시다. 1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었다는 것은 이제 모세와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행복했던 리더십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공황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급한 나머지 가나안에 누가 올라갈까를 하나님께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이 질문의 타당성을 인정하신 주님께서는 유다가 먼저 올라갈 것을 2절에서 응답하십니다. 친절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올라가 점령할 땅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넘겨줄 것까지 조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기 좋게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본문 3절에서 보게 됩니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에게 명령하신 네가 올라가라는 명령에 유다는 정면으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반기를 들고 시므온에게 동역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유린하고 있는 유다의 불신앙 장면입니다. 유다의 하나님 명령 무시사건은 단순히 불순종의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의 극치임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당시의 12 지파 중에 가장 강력했던 세력을 갖고 있었던 지파인 시므온 지파를 끌어 들인 것은 가나안의 점령을 하나님의 수단이 아니라 인위적 수단으로 이루겠다는 선포였습니다. 제목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살아내기’가 아니라 시대에 걸 맞는 내 방식으로 살아내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의 ‘살아내기’ 를 거부하는 시대의 정신은 하나님이 성가신, 귀찮은 존재로의 인식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가장 시급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라고 생각하지만 더욱 긴급한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가? 이다.” 정답입니다. 기막힌 통찰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기’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오늘 내 사랑하는 교회가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곱씹어야 할 반성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이 ‘살아내기’에 천착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