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7:6, 21:25 제목: 왜 사사기를 이 시대에 읽어야 하는가? ⓶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를 편집한 편집자가 이렇게 두 번에 걸쳐 같은 구절을 사사기서의 중간 부분에 한 번,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구절에서 또 한 번 기록을 남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사사기라는 기록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구도를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저는 지난 글을 통해 사사 시대를 ‘마구잡이 시대(random age)’ 라고 했습니다. 제가 해석한 본문 두 구절의 텍스트는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초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국가 공동체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사울 왕의 등극이 있기까지 각기 사람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대로 행했다고 점잖게 표현했지만 이 보고는 말 그대로 영적 잣대로 보면 막론하고 자기 잘난 대로 살려고 했던 막장의 혼돈 시대임을 알리는 에두름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막 살았을까? 신명기 역사가는 그 이유를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은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을 말합니다. 그러니 외연을 확장한다면 이 말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영적으로 묶어주는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사라졌음을 시사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나누어야 할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한 공동체의 영적 리더십의 상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라는 치명상을 얻는다는 교훈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복음주의권의 구약학자들이 여호수아의 죽음의 시기를 통상적으로 주전 1170 년경으로 해석하는데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초기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의 정권을 잡았던 사울 왕의 등극을 주전 1050년으로 볼 때 사사시대는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논란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BC 1170년-1050년 사이인 약 120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거의 한 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마구잡이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재론하지만 영적 지도자의 부재 때문입니다. 허나 저는 사사 시대의 막장과도 같은 삶의 일들이 연속적으로 공동체에 일어나게 된 동기를 단순히 사람의 부재라고 해석하는데 그치고 싶지 않습니다. 도리어 조금도 공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비극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곧 전부의 단절이라는 비극 말입니다. 일본 전후 가톨릭 작가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를 보면 대 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를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하는 장면이 작가의 드라마틱한 각색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역의 종교적 최고 권력자인 안나스가 볼품없이 심문당하는 예수에게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은 소름을 끼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 있다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의 모든 제사를 경건하게 거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이것은 사회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거든. 그런 지혜를 나는 나이와 함께 배웠다네.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삶의 방식이 그대의 것보다 현명하다고 본다네. 민족이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유리하지. 인간이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주거지와 함께 모여 결속을 다지는 장소는 만들어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세상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라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의 절망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치명적 위기가 무엇입니까? 예수와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 예수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파악한 마이클 호튼은 그래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 에서 각종 심리적 치료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하고 있고, 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질되었고, 이머징 처치가 어느새 복음의 능력으로 단장되는 등등을 비판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정말로 회복해야 할 기도와 삶은 하나님과의 세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영적 지도자가 곳곳에 세워지게 해달라는 기도와 또 그들이 하나님과의 민감한 소통과 조명함을 이어감으로 엘리 시대처럼 하나님의 이상이 희귀해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독자들과 사사기를 연구하며 현대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노정(路程)에서 이런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