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나는 균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저를 좌편향적인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 첫 번째 책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목사도 이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담긴 27권의 책들은 3년 정도 전부터 읽고 서평을 남겨놓았던 300여권의 책들 중 추려서 담은 겁니다. 내가 너무 잘 아는 전문적인 신학이나 종교학, 신앙적인 부분의 책들을 먼저 내는 것은 신선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어려운 길을 택하자고 생각하고 소설과 인문사회학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면 단순히 독서에 그치지 않고 상당히 많이 생각하고 곱씹는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것이 목사님에게는 대단한 유희인 걸로 보이는데요.
-맞습니다. 소설과 인문사회학에 해당하는 책들은 거의 목회자들이 접하지 않는 분야입니다. 저는 이런 책들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어요.
제가 졸업한 서울신학대학교는 상당히 보수적인 학교입니다. 모든 교수들이 성경중심적인 성경해석을 강조했어요. 그런데 신학석사를 공부했던 연세대에서 성경중심적인 성경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황중심적인 성경해석이라는 강의를 듣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면 그 시대에 출애굽이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성경중심적인 해석이라고 한다면, 더 중요한 것은 출애굽 사건이 오늘 2016년에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반드시 해석하라는 도전적인 강의였어요.
이걸 해석하려고 하면 성경 텍스트 안에 있는 것들만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는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소설과 인문사회학, 자연과학까지 포괄적인 학문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성경해석은 힘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도전이 저로 하여금 여러 가지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하게 했습니다.
사유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매스미디어에 너무 많이 노출되고 심지어 포로가 됐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하는 것을 포기하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천박해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은 공부고, 공부는 독서입니다. 목사가 독서하지 않으면 천박해집니다.
목사님의 글에서 ‘사유’, ‘지성’, ‘고민’ 등의 단어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목사님의 모습을 투영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권면하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제가 목사로서 고민하는 것들은 곧 사유함을 통해 나옵니다. 사유함이 고민으로 연결되고 고민함은 대안들을 제시할 수 있는 것들로 귀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수년 전 2년 6개월 동안 로마서 강해를 했는데 12장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는 ‘영적’이라고 번역돼 있는데, 원어를 참고하면 ‘이성적인 예배, 합리적인 예배’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성적이라는 말을 절대로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저항,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봉쇄했기에 한국교회가 천박해졌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신학생 시절에 조직신학을 배울 때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강의였는데, ‘삼위’는 알겠으나 ‘일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질문했다가 ‘사단이 준 생각이다. 그것을 벗어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점은 불온함입니다. 궁극적인 부분에 대해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고민되는 것이 있으면 질문해야 하고, 그 질문을 막으면 안 됩니다. 발전은 질문하면서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질문들을 막았기 때문에 교회가 박제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목사라도 모르는 것은 서로 나눠야 합니다. 대답할 실력이 없다고 해서 질문까지 원천봉쇄하거나,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창조주이자 구주로 고백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에서 잘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걸로 인정해야 합니다. 약관의 나이에 기독교강요를 집필한 칼빈도 요한계시록은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