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C. S. 루이스와 복음주의 영성(2)2024-03-27 10:45
작성자 Level 10

이원석

(복상 200호)

 

 

우선 이전 내용의 느슨한 반복으로 시작하자. 말년의 루이스는 심오한 영성을 보여준다. 그 열쇠는 사랑이다. 남성적 우정 중심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온 그는 예순에 이르러서야 정말로 사랑(eros)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짧았던 사랑은 그의 영성을 새로운 경지에로 이끌어주었다. 조이와의 사랑으로 인해 영성의 새로운 통찰을 획득하고, 그녀와의 사별로 인해 영성에 깊이가 더해진 것이다.

 

 

  
 
 ▲ 헤아려 본 슬픔 (사진제공 홍성사) 
 

 

<헤아려본 슬픔>(홍성사)은 루이스의 영성이 절정에 달하는 과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루이스의 책을 하나만 택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고르겠다. 참된 영성의 좌소(坐所)는 지성보다 의지라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가슴으로 읽어야 할 텍스트이다. 메들린 렝글의 경우와 달리 루이스의 사별 경험은 그의 영성을 근본부터 허물고 다시 세운다. 그 경험은, 루이스가 사랑의 초심자였기 때문에, 커다란 영적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추구한 루이스는 이 장애물을 도약판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말년은 건조했지만, 이는 달려갈 길을 다 간 자의 마무리 짓는 모습일 뿐이다. 영성은 결과와 과정이 분리될 수 없다. 루이스의 노년은 실상 그가 곧은 심지로 올바른 방향을 취했다는 보증이 된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루이스 영성의 근본적인 방향과 특징을 좀 더 다루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을 다루고자 한다. 하나는 자기 부인에 선행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대중 지향적(즉 평신도적) 측면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그 중요도에 비해 너무 간단하게 다룬 감이 있다. 후자는 지성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로 인해 간과되고 있는 측면이다.

 

이제 첫 부분으로 들어가자. 이전 글에서 루이스가 자기부인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에 대한 그의 독특한 전망을 논하는 가운데 지적했다. 그런데 진정한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참된 자유의지가 선행해야 한다. 루이스는 당위적 측면으로는 자기부인을 강조하지만, 현실적 차원에서는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천국 문을 여는 열쇠나 지옥으로 가는 티켓으로 사용한다. 어느 경우든지 내세에 대한 결정과 그 책임은 인간 스스로 져야 한다.

 

그러므로 루이스의 하나님은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지 않으신다고 하는 면에서는 엘룰의 하나님과 같다(주-1). 즉 엘룰과 루이스는 이중예정설을 거부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인간이 스스로 지옥에 간다고 하는 점에서 엘룰과 입장을 달리 한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기에 각각의 의사를 존중하시는 것이다(사랑의 결과는 인격의 존중이어야 한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엘룰의 하나님이 보여주는 사랑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신의 뜻에 따라 획일적으로 천국으로 인도되는 폭력적 시혜(施惠)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몇 마디의 언변으로 해결될 간단한 사안은 아니다. 무엇보다 루이스 자신이 내세에서의 운명과 관련해서 언급할 때에는 대체로 은유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루이스의 입장을 보편구원론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물론 그에 대한 오해(오독)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러한 언어 사용에 일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는 보편구원론과는 달리 정화를 위한 심판의 장소인 연옥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중간 영계에서 각자의 본질(의지)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삶과 마음이 천국의 형상인가, 지옥의 형상인가에 따라 자신의 갈 곳을 택한다고 보았다.

 

  
 
 ▲ 개인기도 (사진제공 홍성사) 
 
그러므로 영적 형성은 자유의지의 행사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은 루이스의 영성 이해에 있어서 중심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는 그리스도를 중심한 자기부인을 지향해야 한다. 뒤집어 보면, 그가 생각하는 죄가 곧 자기집착이라는 뜻이 된다. 자기를 비우면, 다른 무엇을 채워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이다. 자기와 그리스도가 하나의 왕관을 같이 쓸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건전한 방향감각을 우리는, <고통의 문제>(홍성사)를 포함한, 그의 여러 저작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영광의 무게>에서 그는 자기부인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밝히고 있으며, <개인기도-말콤에게 보내는 편지>(홍성사)에서는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의 간구를 수동적 의미로만 아니라, 나에 의해 지금 이뤄지게 해달라는 적극적 의미로 이해한다. 즉 자신의 뜻을 굽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세우기 위함인 것이다. 기도를 통해 내 뜻을 이룰 때의 결과는 민수기 11장의 메추라기 사건에 잘 드러난다. 문자 그대로 우리가 죽는 다는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육의 욕망이 성취될 때 영적으로는 무너지는 것이다.

 

 

 

 

 

  
 
 ▲ 시편 사색 (사진제공 홍성사) 
 

 

이 지점에서 우리는 루이스의 모든 저작이 기독론적으로 잘 조율되어 있음을 지적해야겠다. 가령 <시편사색>을 보더라도 시편에 대해 상당히 깊은 수준에서 기독론적으로 접근한다. 심지어 동화 작품인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그러하다. 각권을 지배하는 조직신학적 모티브가 따로 있지만, 전체를 통전하는 주제하는 주제가 바로 ‘아슬란’으로 대표되는 기독론적 모티브이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이다. 기독교인의 이상은 그리스도가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아는 주변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비주의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신비주의자가 아니며, 신비주의자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개인기도>에서 고백한 바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스스로를 평신도의 일원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다. <시편 사색>(홍성사)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닙니다. 저는 히브리학자도 고등비평가도 아니며, 고대사학자나 고고학자도 아닙니다. 이 책은 다만 비전문가가 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쓴 것입니다. …이 책은 아마추어로서 시편을 읽으며 경험했던 여러 어려움과 깨달음을 다른 아마추어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 썼습니다(7~8쪽).” 우리는 그의 저작들에서 이러한 평신도적 감각을 읽어야 한다. 그의 책 속에서 영적 거장의 감각을

찾아내려 한다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루이스의 평신도적 영성을 부각시키려는 이유는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영성을 조명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흔히 말하는 영적 거장의 길로 부름 받지 않았다. 성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영적 세계의 기본 법칙이지만, 참된 신비주의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매우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무당들조차 전지전능하지 않은 초자연적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정상인의 삶을 포기한다(주-2).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사실 영계의 많은 부분들이 일반 신자들에게 가려져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많은 신앙서적들이 이 점을 구별하지 못해 저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독자들을 호도한다. 우리에게는 겸손이 필요하다. 오히려 작은 것들을 통해 큰 것을 볼 필요가 있다. 블레이크처럼 한 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찰나에서 영원을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을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영성이다.

 

  
 
 ▲ 예기치 못한 기쁨 (사진제공 홍성사) 
 
  
 
 ▲ 네 가지 사랑 (사진제공 홍성사) 
 
루이스는 기쁨(Joy)과 찬양을 통해 일상의 영성을 밝혀준다. 그의 영적 자서전인 <예기치 못한 기쁨>(홍성사)은 그러한 맥락에서 중요하다. 기쁨은 신이 인간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방법임을 실존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시간은 찰나적으로 영원을 보여주는 창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이끄는 하나님의 손길을 매우 소박한 삶의 영역에서 찾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사랑>도 같은 것을 말한다. 애정(에로스)과 우정(필로에)과 애정(스톨게)은 신의 사랑, 즉 자비(아가페)를 반영하는 매개수단이다. <네 가지 사랑>(홍성사)의 극화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에서 오루알은 자신의 집착으로 인해 동생 프시케를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신과도 단절된다. 오루알의 왜곡된 사랑은 신에 대한 왜곡된 태도와 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은 신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사진제공 홍성사) 
 

 

또한 루이스는 <개인기도>에서 찬양이 즐거움의 표현이며 완성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즉 우리가 일상(피조물)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하나님(창조주)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일상의 향유가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 성숙의 방편이 된다(주-반면 국내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멀린 캐로더스 목사의 주술적인 찬양관은 영성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조장할 따름이다. 그는 찬양을 통해 신을 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상적 영성은 평신도적 영성의 전부가 아니다. 평신도적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세련된 모습만이 아니라 소박한 측면도 포함한다. 이에 대해서는 상기한 <개인기도>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평신도의 소박한(naive) 믿음을 존중한다. 하나님을 덥수룩한 수염이 달린 분으로 믿는다고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언급은 매우 정당한 것이다. 만일 삼위일체론의 정확한 신앙 여부를 참된 구원의 판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한국교회의 경우,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다한 목회자들이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론 대신에 이해하기 쉬운 양태론(modalism)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경험(소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앙상한 추상적 사실로 신앙하기보다는 생생한 영적 신화로서 받아들여 그 영적 진수를 경험하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그는 톨킨의 영향으로 인해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사실일 뿐 아니라 신화라고 본다). <고통의 문제>와 같은 탁월한 변증서를 집필한 루이스가 God in the Dock에서 “우리 같은 변증론자들은 기독교적 변증론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귀의할 때에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이 원리는 조이와의 사별 경험 이후에 그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 고난의 문제 앞에 직면하게 될 때,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오로지 주님과 만날 때, 극복하게 된다. 고매한 이론이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을 산출해낸  하나님 체험이 생명을 준다. 그리고 사변적인 신학은 전문신학자와 지성인의 전유물이겠지만, 하나님 체험으로 말미암은 신학은 모든 이의 것이다. 설혹 수염달린 할아버지 이미지의 신관이라 하더라도 그 소박한 신관에는 진솔한 영적 체험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상기한 두 가지 측면은 루이스의 천재성을 강조하는, 루이스 우상화의 태도를 경계하게 만든다. 물론 루이스의 저작은 겉보기보다 깊이가 있고, 독자로 씨름하게 만든다. 루이스 독자들 중 상당수는 루이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엘리트적이기보다는 대중적이며, 이론적이라기보다는 체험적(영성적)인 통찰을 얻게 된다. 그의 통찰은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일상 체험의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즉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충분히 파악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그가 의도하는 본질적인 그 무엇에 독자들은 거의 직관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루이스는 이 낮은 곳에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속삭이듯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의 이러한 현실적인 균형감각을 우리는 배워야할 것이다.

 

주-1 루이스의 하나님, 엘룰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 우리의 하나님 상(象)은 성서적이고, 엘룰/루이스의 하나님은 비성서적이라는 식으로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의 신학은 각자 나름의 기질이나 체험과 관련되어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주-2 이러한 맥락에서 이분법적으로 구성되어있는 가톨릭의 윤리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의 경우, 평신도와 달리 성직자는 돈, 섹스, 권력에 대한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이는 청빈, 순결, 복종의 양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체계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럼에도 더 깊은 헌신에는 더 깊은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