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서평] 우리는 그리스도 만으로2024-03-27 10:41
작성자 Level 10

▣   차   례   ▣

 

1 .   다 시   살 아 난   옛   이 단

2 .   보 물 인 가   아 니 면   쓰 레 기 인 가 ? 

3 .   하 나 님 은   심 리 학 자 를   필 요 로   하 시 는 가 ? 

4 .   이 론 세 계 와   진 리 

5 .   심 리 학 적   성 화 ? 

6 .   성 경 을   믿 지   못 하 는   사 람 들 

7 .   종 교 적   쾌 락 주 의 

8 .   그   이 외 의   추 구 할   대 상 

9 .   믿 음 과   노 력 의   조 화 

1 0 .   영 적 전 쟁 :   누 가   누 구 를   쫓 고   있 는 가 ?  

1 1 .   충 족 스 러 운   은 혜

1 2 .   맺 음 말   :   완 전 한   만 족


지 은 이 에   대 하 여   존   맥 아 더 ( J o h n   F .   M a c a r t h u r ,   J R )

탈 봇   신 학 교   졸 업 .   그 레 이 스   커 뮤 너 티   교 회 ( 선   밸 리 ,   캘 리 포 니 아 ) 의   담 임 목 사 이 다 .   잘   알 려 진   성 경   강 해 가 이 며   강 사 ,   마 스 터 스   칼 리 지   그 리 고   마 스 터 스   신 학 교   학 장 으 로   섬 기 고   있 다 .   " 그 레 이 스   투   유 ( G r a c e   t o   Y o u ) " 라 는   라 디 오   프 로 그 램 을   매 일   진 행 하 기 도   한 다 


서           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모든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한 충족성을 발견한다. 우리 주님의 신성한 능력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다. 인간의 지혜로써는 거기다 무엇을 첨가할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순간에 그가 필요로 하는 모두 것을 받는다. 각자가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이미 갖추어져 있다. 다른 그 무엇을 추구할 필요성은 전혀 없다.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였을 때, 그는 "다 이루었다"고 승리의 외침을 발하셨다(요 19 : 30). 구원 사역은 완수되고 성취되었다. 아무것도 빠뜨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 관한 참된 지식을 통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받은 셈이다(벧후 1 : 3).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지혜, 의, 성화, 그리고 구속을 얻는다(고전 1 : 30). 그 분의 은혜는 모든 상황을 위해 충족스럽다(고후 12 : 9).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모든 영적 축복을 받는다(엡 1 : 3). 그 분은 단 한번의 희생으로써 우리를 영원토록 완전케 하셨다(히 10 : 14).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골 2 : 10).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은 영적인 모든 차원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에 실패함에 따라, 온갖 종류의 변질적인 세력들이 밀려들고 있다. 그릇된 교리, 율법주의, 자유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세속화 등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침식하고 있다. 그러한 사단의 공격은 금세기 초기에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던 자유주의보다 더욱 교묘하고 위험스러우며,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보다 공리적이며, 영적 복리보다 육체적인 안정을, 그리스도를 닮는 것보다는 자존심을, 그리고 거룩한 삶보다는 자기 기분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만족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충족스러운 은혜의 보고를 외면한 채 공허한 인간적인 가르침에 의존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종말이 임하기 전에 성경적인 기독교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 것인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 : 8) 교회는 세속과 방종의 구렁텅이 위에다 그 기초를 놓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요구들을 충족시키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영적 자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는 경건한 신자들을 필요로 한다. 


1. 다시 살아난 옛 이단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축복의 열쇠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방법에 골몰함으로써 곤경을 당하곤 한다. 우리 심령의 깊은 바람들을 충족시켜 주시며 또한 필요한 모든 영적 은사들을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신자들 개개인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고후 15 : 17)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신다(골 1 : 27). 또한 성령께서도 신자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롬 8 : 9)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전(殿)이다(고전 16 : 19).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 : 16).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영적 풍요를 가득 누리는 존재라 하겠다. 

     초대 교회 당시의 영지주의 

    영지주의 세력은 교회사의 첫 4세기 동안 창궐했다.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요한의 묵시,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서, 그리고 빌립복음 등과 같은 위경들은 영지주의적 배경을 가진 책들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순수하고 무흠한 영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악한 물질에 불과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단적인 이론을 내세웠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신성의 광채가 있으며 영성의 본질은 이러한 비물질적인 측면을 고양시켜주는 반면에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충동을 거부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한다. 그들은 주로 지적이고 영적인 계발을 통해 어떠 사람의 내부에 있는 신성한 요소를 드러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공박하였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의 어떠한 궁핍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는 보다 차원 높고 완전한 영적 실체가 있다고 거짓 약속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의 신약 성경 서신서 기자들을 초기 형태의 영지주의와 맞닥뜨렸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영지주의적 개념들을 공박하면서,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고 갈파했다(2 : 2, 3). 또한 그는 성도들에게 이단적인 방법른의 대두를 경계시켰다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 충만하였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2 : 8∼10). 

     현대 교회의 신영지주의 

    오늘날 신영지주의는 다음과 같은 주요한 경향들을 통하여 더욱 세를 확장하고 있다. 
   첫째,  심리학  교회가 인본주의적인 심리학에 매료되는 것만큼 신영지주의 경향을 잘 요약해 주는 것은 없다. 신영지주의자들은 우리가 성경 말씀을 함께 기도하는 것은 너무도 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오직 심리학에 밝은 사람들, 즉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이 사람들의 심각한 영적, 정서적 문제들을 도와줄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일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인도되며 교회 사역 또한 엉망이 된다. 
    분명히 주지할 사실은 심리학으로써 영혼을 연구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것에 제한되어 있다. 심리학에도 분명한 가치가 있지만 행동 연구가 사회의 교육적, 산업적, 물리적 요구 사항들에 기여하는 바가 많다는 사실과 그것이 과연 사람들의  영적 요구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주어져야 한다. 성경 말씀과 성령 밖에서는 인간 영혼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아시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둘째,  실용주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와 기도와 친교 그리고 훈도를 위해 모였으며 흩어져서는 각자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회 모임을 불신자들에게 여흥거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설교를 생략하고 그 대신에 드라마나 버라이어티쇼 따위를 보여주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에서는 이런 류의 실용주의가 초자연적인 신앙을 급속히 대체해 나가고 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권능보다는 인간적인 방법론으로써 영적 실재에 접근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또한 실용주의는 교회가 육신적인 방법으로 영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전제하며, 하나님 말씀의 권능만으로는 죄인들의 무지와 완고함을 깨뜨리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전제한다. 
   셋째,  신비주의 는 인간의 지성이나 자연적인 감각들로써는 영적 실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고 믿는 신념이다. 그래서 객관적이고 관측할 수 있는 외적인 자료보다는 감정이나 직관 등과 같은 내적인 감각에 의해 진리를 찾아내고자 한다. 신비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아중심적이고 자기실현적인 동기에서 출발한다. 신비주의에서는 진리의 출처를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자발적인 감정에서 찾는다. 신비주의 가장 극단적이고 복합적인 형태는 힌두교와 뉴에이지 철학에서 발견된다. 사실상 뉴에이지 철학은 힌두교의 서구적인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은 영지주의와 직면하여 오직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만족할 수 있기를 배우라고 권면했다(골 2 : 10). 그것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가장 정확한 해결책이다. 


2. 보물인가 아니면 쓰레기인가? 

     풍족하게 누릴 유산  -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유업에 관해 많이 언급한다. 사실상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새 언약 관계에 있어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언급하였다(희 9 : 15). 
    우리는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권속으로 택하심을 받았다(엡 1 : 4, 5).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모든 권리와 특권들도 아울러 얻었다. 거기에 다함이 없는 풍족한 유업도 포함되는 것이다. 
    1)  우리의 기업은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개념은 영적 기업에 대한 구약적 이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13 : 33에,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 중에 레위 지파에게 독특한 역할이 맡겨졌다.즉 그들은 제사장 지파였던 것이다. 그래서 여호아께서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셨다. 말 그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기업으로 얻게 된 셈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라고 고백했다(시 16 : 5). 그런가 하면 시편 73 : 25, 26에서 아삽은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말한다. 여하튼 우리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우리의 소유이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상속받고 그분의 존전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참고 : 애 3 : 24, 롬 8 : 17, 베전 2 : 9 

    2)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업이시다 .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영원토록 연합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골 1 :27). 그분은 아버지께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함은."이라고 말씀드렸다(요 17 : 22, 23). 언젠가는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다(요일 3 : 2).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함께 후사가 되어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롬 8 : 17).  

    3)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이시다 . 에베소서 1 : 14는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신다고 말한다. 성령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보증하는 분이다. 

    4)  우리는 구원을 기업으로 받는다 . 베드로는 우리의 기업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포함한다고 말했다(벧전 1 : 5). "구원"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구출 혹은 구원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 이는 율법의 저주, 죄와 그 세력, 슬픔, 고통, 죽음, 그리고 심판 등으로부터의 온전하고도 최종적인 구원을 지칭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어려움 너머를 바라보고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5)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 .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5 : 34에서,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영원한 구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 
    참고 : 요일 3 : 2, 3, 고전 2 : 9 

     두 가지 혁신적인 개념들 

    우리의 영원한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확신하는 일에 있어 핵심이 되는 일이다.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혁신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즉 '하늘에의 비전'과 '지연된 만족'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에의 비전이란 우리의 시야를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거두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풍족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다 맞추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마 6 : 23). 바울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다(골 3 : 2). 또한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말했다(요일 2 : 15). 
    지연된 만족이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에다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내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성취될 것이며, 당신의 의와 권위는 밝히 드러날 것이며, 또 당신의 성도들이 놀라운 해방을 경험할 것이다. 

     영원한 기업을 주신 하나님을 경모함 

    하늘에의 비전을 가지고서 인내하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소망하며 이로 인해 일시적인 상황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모하는 것을 포함한다. 
    1)  소명을 기억하라 .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벧전 2 : 9). 그리하여 우리는 사단의 지배를 받는 죄악된 세상과 대치하고 있으며 세상의 진노를 유발한다. 따라서 우리는 핍박의 위협 때문에 직면하는 것을 놀라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바로 소명이기 때문이다(벧전 2 : 2∼23) 
    2)  하나님을 찬양하라 . 마지못해 경배하는 것보다는 찬양으로 경배하는 것이 훨씬 낫다. 베드로가(벧전 1 : 3∼5)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을 분명히 시사한다. 하늘의 기쁨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끊임없이 찬양하는 것이다. 
    3)  기업을 기억하라 . 우리의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시련 중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게 하는 중요한 비결이다. 우리 기업의 풍성함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양하게끔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존재이지만(벧전 1 : 1), 하늘 나라의 시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을 받는 자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기업을 받게 되었는가? 

    우리는 영적 중생을 통해 기업을 얻는다. 우리의 죄악된 상태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길뿐이다. 믿음이란 구원을 위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복음에다 다른 무엇인가를 덧보태고 싶어한다. 예컨대 종교적인 의식, 어떤 행위 지침, 혹은 교회 모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구원은 행위를 통해 얻어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선물이다(롬 3 : 21∼26).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스스로 변화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료로 의롭다 칭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고후 3 : 18).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고백했다(빌 1 : 21). 육체적인 죽음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인도할 뿐이며, 그곳에서 우리의 소망은 영원토록 실현될 것이다. 신자들은 결코 무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소망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1 : 3). 예수께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 : 19),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11 : 25)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당신의 선언을 입증하시기 위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43, 44절) 

     우리 기업의 특성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이라고 베드로전서 1 : 4에서 표현했다. 
    "썩지 않고"로 번역된 헬라어 ' 아프타르토스 '는 부패하지 아니하고 영구적인 어떤 것을 지칭한다. 
    "더럽지 않고"(헬, ' 아미안토스 ')는 죄, 악, 부패 등에 의해 오염되거나 더렵혀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죄악의 흔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세상(롬 8 : 20∼23)과는 달리 우리의 기업은 결코 손상되거나 부식되어질 수 없다. 그것은 죄의 영향으로 인해 흠집이 나거나 더렵혀지지 아니한다(계 21 : 27) 
    "쇠하지 아니하는"은 꽃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헬라어에서 온 말이다. 본문의 문맥에서 그것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시사한다. 
    이 세 가지 용어들은 죽음과 죄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잘 설명해준다. 

     우리 기업의 안전성 

    우리는 기업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 하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업을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장 안전한 장소인 하늘에 간직해두고 계신다. 그곳은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는" 곳이며(마 6 : 20),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한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계 21 : 27)... 
    우리를 지켜주고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궁극적인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후사로 삼아주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사 우리 속에 시작하신 선한 일을 온전히 이루게 하실 것이다(빌 1 : 6). 
    여하튼 우리의 기업에 대한 또다른 보증은 우리의 끈기 있는 믿음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했다(벧전 1 : 5).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생기게 할 수 없다(엡 2 : 8, 9, 빌 1 : 29). 믿음은 은혜로 말미암아 생겨나서 은혜에 의해 지탱되며 또한 은혜에 의해 활력을 얻는다. 


3. 하나님은 심리학자를 필요로 하시는가? 

     상담 사역의 전문화  - 소위 기독교 심리학자들과 기독교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성경만으로 사람들의 가장 깊은 개인적, 정서적 요구들을 해소시켜 주기에 부족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진정한 심리학(영혼을 연구하는 학문)은 그리스도인들에의해서만 올바로 습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영혼을 이해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출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 심리학은 무신론적인 가정과 진화론적인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차원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온전함으로 향하는 길이 영적 성화의 길이다. 과연 우리는 세상의 감각적인 지혜와 행동주의라고 하는 썩은 물을 얻기 위해 탁월하신 상담가와 생수의 샘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야 하겠는가? 
    우리 주 예수께서는 모든 시험과 시련과 삶의 상처를 온전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대처하셨다. 예수님이 당하신 저러한 고난들은 그 어떤 인간의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문제들을 온전히 극복하는 길은 그리스도를 닮는 길밖에 없다. 
    "영혼 사역자들"은 다른 이들을 자신의 영적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그러기에 심리학자로서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행동 과학은 과연 얼마나 과학적인가?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적, 정서적인 과정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과학은 간주되기가 힘들다.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 내의 상담 분야에서 엄청난 악영향을 유발하고 있다. 
    -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사람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 
    - 어떤 사람의 태도와 행동을 이해하고 교정하기 위한 열쇠는 그 사람의 과거를 살펴보는 데 있다. 
    - 개인의 문제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 인간의 문제는 성격상 순전히 심리학적인 것이며, 영적 혹은 육체적 상태와는 무관하다. 
    - 깊게 뿌리박은 문제들은 오직 심리 요법을 이용하는 전문적인 상담자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 성경, 기도, 그리고 성령은 특정한 유형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부적절하고 단순하다. 

    심리학자들은 발견한 치료법들을 고가에 팔 뿐만 아니라 그러한 치료법을 적용할 질병을 새로 개발해내기도 한다. 그들의 영업 전략은 효과를 발휘해 왔다. 질병으로 간주할 어떤 문제들을 고안하여 사람들이 절망 섞인 표정으로 병세를 시인하기까지 거듭해서 주지시킨다. 실상 심리학은 그 바탕에 깔고 있는 무신론적 진화론만큼이나 비과학적이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심리학"도 두 가지 모순되는 사상 체계를 결합해보려는 시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