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2:6-10 제목: 고의적 무지(無知)를 가장 경계하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여호수아 24:28-31절과 병행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서 기자는 특히 31절에 아주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세밀하게 이해해 본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여호수아가 생존해 있었을 때와 그가 죽고 난 이후를 기점으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을 아는 세대와 그렇지 않는 세대로 구별된다는 선언임을 알게 해줍니다.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달려갔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뒤 오늘 본문 사사기 2:10절을 보면 판이 바뀌었음을 증언합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그 세대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의 사람들을 말하고, 다른 세대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소개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서를 병렬해 놓고 볼 때 알게 되는 중요한 팩트가 보입니다.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을 알았지만, 그가 죽은 이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주목할 것은 후자의 시대인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상태인 다른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그 ‘앎’에 대한 신학적 통찰입니다. 통상적으로 ‘알다.’(to know) 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는 ‘무의미하게 아는 앎’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친숙하게 아는 앎’이라고 학자들은 개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보는 여타 영어성경에서 ‘야다’를 ‘to know’ 로 번역한 것을 볼 때마다 항상 2%의 부족을 느끼는 갈증이 있었는데 유독 NEW LIVING TRANSLATION (NLT) 영어성경만큼은 ‘야다’를 ‘Did not acknowledge’ 즉 ‘인지하지 않았다.’라고 번역하였기에 의미심장하게 받았습니다. 왜 이 번역에 필이 꽂혔는지 아십니까? 고의적 무지함이라는 통찰을 끄집어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쉬운 말로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다른 세대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지해서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고의적 무지를 즐겼다는 해석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는 다음에 이어질 사사기 2:11-13절에 기록된 대로 바알숭배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근거로 독자들과 필자가 나누고 싶은 영적 담론이 있습니다. 21세기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지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요소가 있다는 점입니다.
●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를 싫어하는 고의적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를 불편해 할까요? 왜 하나님을 ‘야다’로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을 진심으로 아는 것을 부담스러워할까요? 하나님을 전심해서 알게 되면 신 바알리즘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섬기기가 아니라 생각하기 따라 얼마든지 세상과 타협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얻는 수많은 감각적, 찰나적 유리함을 주는 하나님 같은 것을 숭배함으로 오는 세속적 가치와 이익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문화라고 인식하는 자들의 지천에 깔려 있는 오늘, 자기를 부인하라는 주님의 요구가 너무나 싫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이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다.”(나를 따르라, p,94) 얼마나 현대인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부담감입니까? 영국이 낳은 금세기 위대한 신약학자인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는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이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당하신 사건을 단 한 줄의 표현으로 일갈했습니다. “어려운 길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 예수에게까지 공격한 이 사탄의 외침이 얼마나 달콤합니까? 사정이 이러니 하나님을 고의로 인지하지 않겠다는 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직면한 또 다른 광야의 시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알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면면이 어찌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다른 세대에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2017년 2월의 현재를 살고 있는 저를 비롯한 독자 전체들이 직면한 영적 투쟁의 내용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캐나다 뉴 라이프 커뮤니티의 담임목사인 마크 뷰캐넌이 쓴 ‘열렬함’(Your God is too safe)에 남긴 그의 어록이 오늘따라 가슴을 때립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위험한 일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p,46) 가슴에 담기는 소망하며 독자들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