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27-36
제목: 그리스도인들에게 중립은 없습니다.
금년도에 읽어야 할 100권의 책 중에 첫 주 독서 과제를 존 스토트의 ‘설교’(IVP)와 팀 켈러의 ‘설교’(두란노)로 정해 숙제를 마쳤습니다. 글 중에 나오는 여러 촌철살인들이 무궁무진하지만 특히 존 스토트가 말한 단문이 저의 심장을 흥분시켰습니다. “강단은 중립일 수 없습니다.” 이 외침은 작금, 한국교회라는 목양터에서 목회하는 건강한 목사라면 누구든지 예외 없이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슈일 것입니다. 존 스토트를 통해 제가 도전을 받은 이유는 ‘강단은 타협할 수 없다.’로 맥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 오늘 본문도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초기 흑역사가 계속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고발당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가나안 지명으로 루스라고 불렸던 벧엘을 정복하였던 요셉 지파가 얼마나 치사한 방법으로 비겁하게 그 땅을 차지했는지를 살폈습니다. 헌데 오늘 본문은 점입가경입니다. 하나님이 방법인 아닌 영적 주도권을 빼앗긴 요셉 지파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가 가나안 점령 전쟁에서 빼앗지 못한 성읍들의 이름이 본문에 열거되어 있습니다. 27절 이하를 보면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로 소개됩니다. 동시에 29절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쫓아내지 못한 지역이 게셀 지역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정적 시너지였을까요? 이스라엘의 유력지파였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가나안 거민들을 의도적으로 쫓아내지 않자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 역시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동거하게 되었음을 30-33절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왜 사사기 기자는 집요할 정도로 요셉 지파의 가나안 정복사를 이렇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분명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영적인 도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도전을 저는 이럴게 문장화시켜봅니다.
*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식(式)이 아닌 것에 중립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
1장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쫒아내지 못하다.(8회)’와 ‘노역을 시켰다.(4회)’입니다. 지난 과면(過面)에서 전술했던 것처럼 개역개정판에 ‘쫓아내지 못하다.’라고 점잖게 번역한 이 문장은 히브리어 성경을 통해 정직하게 번역하면 ‘내쫓지 않았다.’가 더 적절합니다. 내쫒지 않고 가나안 거민들을 노동의 유익으로 삼아 그들에게 노역을 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가나안을 점령해 가는 과정에 하나님의 식보다 더 유익이 되는 세상의 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찔끔 눈을 감으면 가나안에서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틈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나안 거민과의 적절한 타협과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을 쫒아내라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거부만 하면 얻어지는 엄청난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시안적으로 엄청난 세속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만 본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향하여 사사기 기자는 앞으로 닥쳐올 불길한 여운을 1장 끝부분에 남기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분명히 단 지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차지해야 할 지파였습니다. 정황이 그런데도 단 지파는 도리어 가나안의 한 족속이었던 아모리에게 공격을 받아 산골짜기로 쫓겨나 내려오지도 못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요셉 지파가 강성해진 탓에 아모리 족속이 그들에게 접수되어 그 가련한 신세를 모면하게 되지만 이미 단은 하나님의 지파 공동체로서 너덜너덜하게 스타일을 구긴 상태가 되었음을 여지없이 사사기 기자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역사가가 무엇을 예고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식이 아닌 세속의 식과 타협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훗날 가나안화 되어 하나님을 떠나는 비극 드라마의 시놉시스를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2년 전, 교황 프란체스꼬가 이 땅에 와서 던지고 간 한 마디에 전 국민이 열광했습니다. “아픔을 당한 자 앞에서 나는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그의 말을 가슴에 담았지만 더불어 목사로서 이런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교황의 말에는 열광하면서 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시도 때도 없이 세속적 가치와 타협하며, 불편하고 부담되는 하나님의 식을 사수하라는 주님의 레마에는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며 너그러운가! 에 대한 거룩한 분노 말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하나님의 식을 지키는 것은 교양 선택과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전부에게 위탁된 전공필수과목임을 상기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식을 사수하는 것에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립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