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22-26
제목: 뭐가 문제였지?
치유 사역자 프랜시스 맥너트가 쓴 ‘치유’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부서진 바이올린으로는 연주하실 수 없다.”
단문이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촌철살인입니다. 가장 평범한 이해는 하나님의 동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역자는 그래도 기본은 해야 한다는 이해입니다. 헌데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도 더 이상은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는 기막힌 영적 난감함을 보이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면면을 사사기 기자가 고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 22-26절을 읽다보면 마치 여호수아 2장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여리고성 정탐꾼들과 기생 라합의 이야기와 흡사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요셉의 가문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들은 가나안 지명의 이름으로 루스라고 하는 벧엘을 공략하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벧엘로 올라갔는데 마침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요셉 가문 사람들이 이렇게 청을 합니다.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24-25절)
여기에 기록된 ‘청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는 우리나라 말 표현으로 적절한 단어가 있습니다. ‘제발’입니다. 요셉 가문의 사람들이 마침 만난 벧엘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벧엘의 입구를 제발 알려달라고 사정하는 모습은 전술한 여리고 정탐꾼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보이고 있음을 여지없이 발견합니다. ‘제발’에서 보이는 단초입니다. 이 간청을 받은 벧엘 사람은 자기 가족들을 선대하겠다는 약조까지 받고 들어가는 문을 가르쳐 주자 요셉 가문 사람들은 벧엘로 들어가서 벧엘을 치고 정말로 약속한 대로 길을 안내한 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살려주었다고 사사기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의 정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여호수아 시대의 여리고 점령 기사에서는 라합이 먼저 하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여리고 성의 상황을 알려주었고 또 그녀의 집에 정탐꾼들을 숨겨두는 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라합이 참여한 것이었지만, 본문 사사기의 벧엘 정복사는 오히려 요셉의 가문 사람이 도리어 벧엘 사람에게 간청을 하는 반대의 경우였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여리고성 점령사는 라합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안으로 동화된 경우이지만, 본문의 벧엘 점령사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의 벧엘 쪽으로 흡수되어 같이 살게 되는 정황을 예측하게 하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 영적 주도권의 상실입니다.
초기 사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의 여정에 명령하신 일체의 권고를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벧엘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붙여 주실 것을 선언하셨다면 벧엘의 거민과 타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가문들은 벧엘의 힘과 타협했습니다. 그것도 여리고 정복 시에 갖고 있었던 영적 주도권(spiritual initiative)을 이번에는 벧엘에게 반대로 넘겨주면서 말입니다. 시작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출발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의 가장 가슴 아픈 추락을 주님이 허락하셨던 영적 주도권을 세속적 가치에게 넘겨준 비극이라고 주저 없이 진단하고 싶습니다. 이 일로 인해 교회가 천박해졌고 심지어 작금에 이르러는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출신의 가장 신실한 20세기 선교사로 인정받았던 스탠리 존스의 ‘순례자의 노래’ 를 보면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존스가 대학가에서 모 교회 주보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주보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에 모교수가 예수의 문제에 대하여 강의할 예정임” 이 글을 보는 순간 스스로 독백합니다. “예수가 문제라고? 그 분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셔. 그 분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지금도 해결해 주시고 또 앞으로도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 분은 문제가 없어! 문제는 나이지.”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상실된 영적 주도권을 되찾으십시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키워드입니다. 샬롬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