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회 사무총회 개회사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한 젊은이가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다음과 같은 게시물을 붙여놓았습니다.
“비텐 베르크 대학의 교수인 마르틴 루터 신부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밝히려는 소망으로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 성명서에 관해서 대학 안에서 토론하고자 합니다. 토론 장소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문서로 의견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된 루터의 95가지의 테제들로 정리된 성명서는 당시 넘을 수 없었던 절대 권력이었던 가톨릭교회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종교 개혁의 장을 열게 됩니다. 이후 개신교회(the protestant)는 태동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금년은 이렇게 가톨릭교회의 심각한 교리적 왜곡과 올바르지 못한 성경 해석의 틀을 바로 잡기 위해 역사의 무대 위로 개신교회가 올라온 지 꼭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가 2017년이라는 말입니다. 헌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날 아침에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되뇌고 싶은 문장이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입니다.
‘장미의 이름’ 으로 유명해진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미네르바의 성냥갑’에서 공산주의 기초를 놓은 칼 마르크스가 역사는 반복되는데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라는 도식으로 반복된다는 주장을 비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을 눈 여겨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칼 마르크스의 말 대로 한 번은 비극의 형태로, 한 번은 희극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상이한 형태의 비극들로 계속 반복되기도 한다.”
어쩐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에코의 말이 마르크스의 말보다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암흑의 시대라고 평가되던 중세시대의 가톨릭보다 질적으로, 신학적으로 더 못한 한국의 개신교회의 자화상을 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에 한국교회의 다양한 문제점들은 대형교회들의 교회답지 못함이라는 일탈로 야기된 것이라고 그 문제의 핵심을 축소화시키려는 경향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교회의 약해짐과 허물어지고 있는 원인은 일부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바로 서 있는 목회의 현장 역시 자꾸만 전혀 교회답지 못함이라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공범자의 의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자각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이유는 깨달음이 아직은 살아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올바른 신학적 바탕을 전제로 성서가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로 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교회가 교회라는 본질을 상실하는 이유는 외적인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적 요소 때문일 것입니다. 그 내적인 요소는 교회가 세상의 식을 닮아가려는 기막힘입니다. 아무리 곱씹어도 교회는 세상을 리딩(LEADING)해야 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보루인데 도리어 교회가 세상에게 리딩 당하고 있으니 이런 참담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교회가 겪고 있는 비극의 절정입니다. 일련의 이런 어이없는 일들이 지속되는 한,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래 전, 김수영 시인의 걸작인 ‘풀’을 만났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현재진행입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김수영의 ‘풀’을 시대에 고통 받는 민중 혹은 민초들로 해석하는데 별 이견이 없습니다. 해서 풀의 위대함은 어떤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강인함에 있음을 시인이 피력했다는 것에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인의 시어로 건져 올린 ‘풀’에 열광한 이유는 ‘풀’을 내가 지키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교회’라고 억지를 부렸더니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진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소를 보낼지 모르겠지만 나는 교회가 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나는 풀처럼 교회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교회가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는 먼저 웃는 공동체였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교회가 울기는 울지만 울음의 끝이 다시 일어섬이라는 희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의 식(式)에 이끌림을 당하는 천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式)에 이끌림을 당하는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전술했듯이 해산의 고통을 동반합니다. 세상의 식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 매력에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식은 거기에 비해 너무나 촌스럽게 보입니다. 너무나 고루(out-of-fashion)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불편합니다. 하나님의 식은 언제나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풀이 바람보다 항상 먼저 일어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의 식이 세상의 식을 잠식하고 이끄는 용기라고 확신하기에 세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기를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바울은 너무나도 이 은혜를 일찍 깨달았고 확신했기에 문제 많던 공동체인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담대하게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이 구절은 세인 공동체의 2017년 표어인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는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주제절입니다. 이렇게 살기를 선포하며 세인교회 정관 제 7조 2항 1호에 의거하여 성원이 됨을 확인하였기에 제 9회 사무총회가 개회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주후 2017년 1월 1일 제천세인교회 담임목사 이강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