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
폴 마샬 지음
IVP / 2000년 6월 / 289쪽 / 9,000원
제1부 세상에 대한 두려움
1. 교회: 따분한 복음?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나는 죄책감에 휩싸여 지내고 있었다. 나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삶을 살고 전도하고 기도하며 성경 공부 및 다른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이것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서 나는 내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전임’ 사역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 일에 필요한 기술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그 생각 자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나를 목회자나 선교사로 맞이하는 불행을 겪었을 교회나 선교지로서도 끔찍한 일이었을 게다). 그렇다면, 온전하고 통합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 직면하고 있는 마음 아픈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없다. 언뜻 보면, 이 말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지침이 될 만한 자료들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전도, 기도, 성경 공부, 지역 교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설교도 있고, 책도 있고, 지침서도 있으며, 결혼생활과 부모 노릇에서부터 신체적 건강과 정서적 건강을 유지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안내서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고민에 답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자료들 중 많은 부분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부여하신 목적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나이스’한 그리스도인
‘기독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품을 한다(때로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앙인은 기독교에 무언가 생명력이 있고 삶을 변화시키는 특별한 것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이스’(nice, 즐겁고, 쾌할하다)한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주님은 절대로 ‘나이스’한 분이 아니셨다(본래 nice라는 말은 어리석음, 우매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지루한 분도 아니셨다.
예수님 당시에 적대자들은 그분을 결코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 듯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험한 선동가라는 이유로 배척했다. 분명 그리스도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우셨으며, 정직한 구도자에게는 인내심이 많았고, 하늘 앞에서는 겸손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존경받던 성직자들을 위선자라고 모욕하셨으며, 헤롯 왕을 “저 여우”라고 말씀하셨으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다. 또한 그 분은 분에 차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습격하고 그들과 물건들을 성전에서 내쫓았고, 성스럽고 고색창연한 수많은 규제들을 논파하셨다.
하나님의 세상은 중요하다
예수님의 적극적 성향과는 달리 현대의 신앙인은 그와는 반대다. 죄에 대해서도 단지 피하려고만 하는 수동적 자세만을 가진다. 우리가 그처럼 수동적이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세상을 그만큼 진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으면 육체는 영구히 사라지고 단순히 육체 없는 유령으로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이단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러한 사상을 담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점심으로 물고기를 드셨고, 몸에 있는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신조들은 보편적으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확언하고 있다.
제2부 세상에서의 우리의 지위
2. 창조와 책임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하나님은 왜 우리를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해서 창세기 1:2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지배권을 가진 자로 창조되다
다른 창조물과 비교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순서나 방식에 차이가 있다. 창조하시던 처음 닷새 동안은 하나님이 “…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만 듣는다. 그러나 여섯째 날은 다르다. 우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왜 그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듣게 된다. 우리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계획을 세우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며(1:26),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실제로 그 계획을 실행하셨음을 듣는다(1:27). 그 계획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형상이 되게 하여 온 땅을 다스리게 한다”는 신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의 근본적인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몇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뜻은 세상의 죄악된 측면, 특별히 사람들이 세상에, 특히 사회에 잘못 세워 놓은 질서를 가리킨다. 로마서 12:2절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부분을 위의 기준에 맞추어 다시 번역하면, “이 세대를 따라(맞추어)서 지내지 말고” 혹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대로 하지 말고” 혹은 “비기독교적인 세계가 여러분의 기준이 되도록 하지 말고”이다.
두 번째 뜻은 영토나 지역을 가리킨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 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마24:14)
세 번째는 ‘창조된 질서’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만드셨으며 우리가 그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위하여 지어진 질서를 말한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바로 이런 뜻이다. 즉 그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이며 앞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세상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요3:17) 오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는 요한서신의 말씀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는 말씀은 서로 모순 되지 않는 것이다(요일 2:15절은 첫 번째 의미의 세상이고, 요 3:16절은 세 번째 의미의 세상이다).
3. 죄와의 싸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원래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삶에 닻을 내리고 있던 그런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서, 세상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관계도 단절되거나 오염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창조주에게서 끊어져 나갔으며, 그들 자신에게서도, 서로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연 세계와 다음 세대들로부터도 끊어져 나가게 되었다.
죄의 광범위한 결과
하나님은 태초에 인류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권위와 책임을 부여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죄의 결과도 온 창조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죄는 땅(지구)도 오염시킨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
그러나 하나님이 여기서 선언하신 저주 때문에, 그 저주 이후로 아담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노동은 타락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노동은 우리가 지음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창 2:15) 우리는 죄 때문에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니다. 다만 죄 때문에 우리가 처참할 정도로 “종신토록 수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녀를 출산하는 일까지도 죄로 인해 오염되었다.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NIV에는 “네가 고통하면서 자식을 낳을 것이다”로 되어 있다)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저주는 자녀를 출산할 때의 산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 자체, 즉 해산의 수고로 나올 자들이 저주임을 가리킨다.
구조선 신학
우리는 보통 이 세상을 살면서 ‘청지기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오염된 이 세상에 ‘청지기의식’이 필요할까? 오히려 세상은 마치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는 타이타닉처럼 죄 속으로 침몰하는 배가 아닐까? 이때 필요한 것은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구조선으로 옮겨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이러한 일련의 관점을 ‘구조선 신학’(lifeboat theology)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구조선을 타고 다니면서 물 속으로 빠져가고 있는 희생자들(사람만)을 건져내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적 관점은 ‘구조선신학’이 아니라 ‘방주신학’이다. 노아의 방주는 사람들만 구했던 것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는 다른 피조물들도 구했고 보존했던 것이다. 또한 방주는 피할 구멍만 찾은 것이 아니라 땅에 복귀해서 다시 시작할 길을 찾았다.(구조선신학에서는 이 세상을 멸망할 세상으로 보고 있고, 방주신학에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다시 이루어질 곳,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회복의 장소로 보고 있다.)
제3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5. 배움의 경이로움
나는 많은 것을 공부했다. 벽에는 학위증이 담긴 액자도 몇 개 걸려 있다. 나는 그 학위들이 몇 가지 면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 학위들을 처음 땄을 때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 학위들은 내가 한 분야의 정보와 지식에 대해서 정통하거나 어떤 기술을 습득하였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학위들이 배움의 핵심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짜 배움은 무언가 새로운 것에 부딪힐 때 일어난다. 배움은 우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싸움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리듬에 대한 도전이다. 배움의 핵심은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며 적응하고 다른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배울 때 일어난다. 대학교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우리를 가장 훌륭하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곳은 겸손 혹은 용기를 요구하는 나환자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저자는 자신이 나환자 수용소의 경험을 통해서 지식으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세우신 학교이다
우리는 배워야만 한다. 아기들도, 학생들도, 부모들도, 교사들도 누구나 다 배워야 한다. 우리는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하고 적응하고 조정하고 개발해야 하는 피조물로 만드셨다. 우리의 삶과 기술은 완성품으로 한 번에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 여정을 통해서, 계속 발전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배움이란 그저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과정이나 성경 기초 지식을 확고하게 다지는 일이 아니다. 또는, 단지 더 많은 지식을 얻어서 더 잘하게 되거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배움은, 무엇인가 아주 새로운 것에 부딪쳐서 거기에 새롭게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단지 성경을 잘 알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세계에서 그 세계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해서 배우기 위해서다.
또한 우리는 지식과 지혜 가운데서 성장하고 의문을 갖고 더욱 깊어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변화를 요구한다. 무조건 변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하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실체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며,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야 마땅한지 그 방향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성경 자체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며 그럴 의도도 없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오히려 성경에 비추어 우리가 세상 자체를 조사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배움은 끝이 없는 탐험으로서, 때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향과 목적지가 있기도 하다.
규칙대로 경기하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어떤 원칙을 주셨다. 그것은 마치 농구에 규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이 규칙을 모른다면 농구뿐만 아니라 어떤 게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규칙만을 안다고 해서 경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농구 경기 규칙을 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나를 팀에 끼워주지 않는다. 반면,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은 언제나 규칙을 잘 지키기 때문에 위대한 농구 선수가 된 것은 아니다. 그가 위대한 농구선수가 된 것은 그 규칙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배우고 그 가능성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의 근본 토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인간 삶에서 중요하며 특별한 메시지, 즉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며, 어떻게 실존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악은 왜 존재하는지 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를 통해서 무슨 의미인지를 배워야 할 책임은 여전히 우리 인간의 몫이다.
6. 일에 대한 조망
노동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노동은 창조 세계의 한 현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노동은 타락이전에도 존재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노동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노동은 오염되었다. 노동은 유쾌하기보다는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운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여전히 우리의 부르심의 한 부분이며 우리가 구속해야할 대상이다.(여기서 노동의 범위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기저귀를 가는 단순한 일까지도 포함한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혹은 일)이라는 단어는 임금이나 급료를 받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고용되거나 직무를 수행하는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수도꼭지를 고치는 일, 자녀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일, 쓰레기를 치우는 일, 이부자리를 정돈하는 일, 자원봉사, 환자나 감방의 죄수를 방문하는 일 등도 노동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의 손과 마음과 정신으로 행하는 일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사람의 노동이라는 견지에서, 만드시고 형성하시며 건설하시고 땅에 심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창 2:7, 8, 19, 23)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이시다. 장인(匠人)이었던 브살렐의 나무와 돌과 보석을 다루는 솜씨는 그가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했을 때 주어진 것이었다.
예수님도 생애 몇 년을 제외하고는 늘 목수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셨을 때 아마도 설교보다는 나무를 켜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세상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농부(마 13:3), 포도원의 품꾼(마 20:1-6), 추수꾼(마 13:30), 가옥을 건축하는 자(마7:24), 돼지를 치는 자(눅 15:15)가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직접 일을 했다. 그는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일을 했는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렇게 하도록 권면하였다(엡 4:28; 살전 4:11; 살후 3:6-10을 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일거리를 찾을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는데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여가 활동에만 빠져 있거나, 종교적인 명상이나 종말론적 광신에 빠진 삶은 결함이 있는 삶이며,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바울은 자기가 생계를 위해서 손으로 일한 노동을 지칭할 때와 사도로서의 섬김을 지칭할 때 정확히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이 둘 중 어느 것을 언급하고 있는지, 혹은 과연 그러한 구분을 하는데 관심이나 있었는지를 파악하기가 상당히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일상적인 노동의 선함을 강조하였으며, 창조 세계 자체가 노동이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가정에서의 우리의 책임을 똑같이 강조하면서, 남성, 남편, 아버지들도 그 점을 파악하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다. 영국의 위대한 종교개혁가이자 영국의 성경의 아버지였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도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고소를 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더 좋은 일이나 더 나쁜 일이 없다. 물을 붓는 일이나 접시를 닦는 일이나 구두를 만드는 일이나 사도가 되는 일이나 모두 동일하다. 접시를 닦는 일과 설교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7. 쉼에 대한 성찰
쉰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휴식은 모든 일을 끝마친 후에 그저 잠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쉼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며,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반영이다. 쉼은 신앙의 중심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님 아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것, 즉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거저 받음으로써 우리의 궁극적인 성취를 발견한다.
신뢰의 행위로서의 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7일째 안식하셨고, 우리를 향해서도 쉼을 명령하셨는데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이 그것이다. 노동과 쉼의 순환적인 반복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에 안식했다면, 그들은 곡식을 심지 않아서 거둘 곡식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땅에서 그들이 먹고 살 만큼 잉여 생산물이 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했다.(신 25:18-24) 50년째인 희년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더욱 시험을 받았다. 대속죄일을 지낸 다음에 그들은 두 해 동안 완전히 경작하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의지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쉼은 항상 신뢰의 행동, 믿음의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은 종종 구원을 쉼에 들어가는 것으로, 즉 하나님의 선물을 신뢰하고 받는 것으로 묘사한다.(히 3-4장)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자기에게 오는 자들에게 쉼의 자유를 약속하셨다.
제4부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
9. 자연 세계
자연 세계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원시의 웅장함을 그대로 보존한 채 존속했을, 완벽한 조화라는 축복을 받은 독립된 우주가 아니다(자연재해가 많아서 스스로 자멸하기도 한다-산불을 막아주지 않으면 산 전체가 벌거숭이가 되기도 한다). 자연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되었다. 우리 인간들이 부분적으로 자연 세계를 위하여 지음 받았듯이, 자연 세계 역시 부분적으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기독교적 지배
많은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은 창세기의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는 명령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일방적 지배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창조 세계를 돌보고 가꾸라는 성경의 원래의 가르침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인본주의에 물들어 있어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신조로 인간과 자연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만이 유일한 척도라면, 자연은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며 그 자체의 가치를 가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연은 무차별 착취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가르치지도 않으며, “자연이 만물의 척도”라는 똑같이 거짓된 현대의 개념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이 두 가지 모두 우상숭배라고 가르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만물의 척도”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의 적절한 관계에 대해 명령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선한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10. 우리의 정치적 책임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에서 법률 제도와 정치 제도의 발전사를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삶 가운데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결정하는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 후에 왕들이 등장했고 그들과 함께 선지자들도 등장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법에 의거해서 왕에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성경은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행했던 활동보다는 사사들과 왕들이 한 일에 훨씬 더 많이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성경의 인물들은 군사 지도자 여호수아나 궁중의 재사(才士) 다니엘,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과 솔로몬 같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매우 영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었고 성전에서 봉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었다.
11. 상상력과 예술
성경에서 매우 놀랄 만한 사실 중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흠모할 만한 여인들 중 많은 사람이 패션 사업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잠언서의 마지막을 보면, “진주보다 더 귀한 현숙한 아내”에 대한 유명한 묘사가 나온다(잠 31:10). 이 여인은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서 가족의 음식을 준비하고, 밭을 사고, 포도원을 가꾼다(잠 31:15, 16, 20). 이 여인은 가계를 운영하고 사업도 운영한다. 그리고 미식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무역선처럼, 먼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해 온다(잠 31:14).
그렇지만 성경이 이 여인에 대해서 가장 칭찬하는 부분은 그녀가 옷을 만드는 모습이다. 그녀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13절),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는다”(19절). 그녀가 만드는 것은 기능적일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멋있다. 그녀는 침대 커버를 만들며,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21절) 눈이 와서 추워져도 가족들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붉은 색 물감은 아주 비싼 품목이었으므로, 그걸 얻기 위해서 그녀는 꽤 많은 수고를 했을 것이다. 그녀의 침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랄프 로렌(Ralph Lauren: 고급 의류뿐만 아니라 침구류도 생산 판매하는 회사-역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식하였다. 그 침실 용품들은 또한 랄프 로렌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잠옷들이 홍색이었으니까.
이 여인이 자기의 일들을 아주 잘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일을 자기 집안 돌보는 것에만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제로 의류 사업을 했다.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그 일은 그저 그 마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띠를 만들어서 상인들에게 공급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도매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이다(24절).
그런 아내에게서 이런 모든 솜씨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점은 그녀가 주님을 경외했다는 사실임이 분명하다(30절). 모든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가치로웠던 것은 그녀의 품위와 지혜와 믿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재능들은 길게 약술되어 있고, 상당히 칭찬받고 있다. 그녀의 패션 감각은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그리고 소중한 선물로 묘사되고 있다.
12. 창의성과 테크놀로지
기술(테크닉)과 테크놀로지라는 주제는 현대 세계의 화두다. 테크닉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를 말한다. 즉 그것은 ‘어떻게’를 다루는 방법의 학문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달 탐사에서부터 대중 연설에 이르기까지, 핵폭탄 설계에서부터 성행위에 이르기까지, 헐벗은 이웃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책을 쓰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포함된다.
테크닉과 더불어 테크놀로지가 등장하게 된다. 테크놀로지는 테크닉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창작되고 구현된 구조를 말한다. 그러므로 테크놀로지는 우리 인간이 만들고 재형성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테크놀로지는 물리학만큼이나 예술을 고취시키고 엔지니어링과 마찬가지로 가족관계도 고취시킨다. 테크닉과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인간 생활 전반에 관하여 특정 방식으로 애기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생활전반에는 어떤 기술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책임 있는 기술적인 솜씨는 선물인 동시에 소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재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형성하는 인간의 과업이다.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책임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물의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미 하나님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신 후에 아담을 통하여 공표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었고 하나님은 어떤 이름들이 붙여질 것인지 모르고 계셨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19절) 하셨다. 그래서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의 이름”(20절)이 되었다. 그것이 이제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그 이름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그 점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결정을 따르시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름을 지으면서 아담은 그저 정해져 있는 일련의 법칙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아담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세계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5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소망희망의 빛
13. 예배와 우상 숭배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배를 너무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여 “예배는 땅과 상관없는 것, 창조세계와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러나 예배는 창조 세계 안에 있다. 그리고 예배는 이 땅에서 물러나 있는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세계에 온전히 참여하는 시간이다. 예배는 우리의 사람됨을 벗어 버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장 온전히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인정하고 회복시키는 시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주변에 있는 것들을 경배하거나 -궁극적인 존재로 삼거나-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은사를 신격화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를 인간의 삶 너머에 존재하는 영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중심으로 데려다 준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 존재의 중심이시며 우리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인기 가수였던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가사 중에는 “당신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이다.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사람은 그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맥락에서 묘사되고 있다.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다른 ‘신’을 예배하고 섬기고 있을 것이다.
우상의 형상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