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역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문: 사사기 3:1-6 "마음에 음악이 없다면 음악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에 시가 없으면 시를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글쟁이 장석주씨가 '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소개한 글입니다. 글을 접하면서 이런 감회가 밀려왔습니다. “맞다. 중요한 것은 기본기이다.” 음악의 기본기가 없는데 어떻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이해할 수 있으며, ‘넬라 판타지아’의 감동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시의 기본이 없는데 어떻게 윤동주와 기형도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목사로서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 선민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지 않은 패역한 가나안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의 면면이 드러나 있음을 보며 못내 씁쓸함 마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필자와 독자들은 이미 지난 1장과 2장 이해를 통해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내쫓으라고 그렇게도 강하게 경고하셨던 가나안 거민들을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의 아주 유익한 도구로 판단하여 그들을 내쫒지 않고 동거하는 불순종을 저질렀던 것을 주지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원하지 않았던 가나안화의 서막을 알린 것 말입니다. 본문 5-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런 일탈로 인해 아픈 마음을 견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의지대로 이스라엘을 향하신 반전 드라마를 쓰시기로 결심하셨음을 필자는 목도했습니다. 제가 반전 드라마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가볍고 얄팍한 이해가 아니라 깊은 사유의 결과물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저버린(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 파기) 이스라엘을 충분히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었지만, 이스라엘을 그렇게 할 수 없어 택하신 방법이 바로 반전드라마의 성격인데 그들이 선택한 것들을 통해 후회하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지난 호에서 함께 나눈 가나안 거민들을 통한 압박이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문장 중에 눈여겨 보아야할 단어가 연속해서 2,4절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남겨두신’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가나안 정착에 유리하여 내쫒지 않고 남겨두었던 족속들이 가나안 거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도리어 신명기 역사가의 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는 것을 용인한 것으로 결론짓고 보고한 것을 보면 가나안 거민들의 가나안 잔존은 하나님의 최종적 승인으로 인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 이해라는 것에 필자는 동의했습니다. 이 해석학적인 접근이 주는 주석적 교훈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무엇입니까?
● 역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혹자는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자업자득이라고. 그들이 좋다고 뿌려놓은 가나안거민들에게 발등 찍힌 것이 이스라엘이고, 가나안 거민들은 이스라엘이 두고두고 후회한 올무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구속사적인 측면으로 보면 이 해석도 무난한 해석이라는 데에는 저 또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국한해 가나안 거민들을 가나안에 남겨놓으신 주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적어도 오늘 우리 모두에게 심오한 영적 도전을 줍니다. 어떤? 역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본문 1-4절에 드러나 있습니다. 남겨 놓으신 가나안 거민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함(1절)과 순종하는지를 알기 위함(4절)이었습니다. 배워야 할 은혜가 보입니다.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지혜는 이렇게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분명한 의식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라는 은혜입니다. 재야 역사학자인 이만열 장로께서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산문집에서 갈파한 울림이 크게 공명되는 것은 오늘 사사기 본문을 통해 주시는 교훈과 그래서 일맥상통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역사와 심판 앞에서 제대로 책임을 통감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면서 기독교인들과 함께 실천적인 삶을 살아갔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렇게 부패하고 절망적으로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절망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다, 역사의식이 없으면 역사 앞에 책임을 지려는 의식이 사라진다. 역사를 무시하고 역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p,144) 역사는 주님의 것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