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세월 호에서 그 하느님은 없었습니다. 찬미의 영역에 있는 하느님은 요청된 존재입니다.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시는 존재와 관계유비의 하느님은 현장과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진정한 찬미는 연민과 동행 아닐까요?” 엘리위젤이 쓴 ‘홀로코스트’(부제: 나치스와 유대인)에 담긴 그 유명한 장면, 피펠의 교수형 장면에 분노하는 한 유대인의 절규,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의 절규에 엘리위젤이 들은 ‘하나님은 지금 저 교수대에 달려 계신다.’ 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실제를 며칠 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지금 진보적인 기독교 단체에서 아픈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행동하며 외로운 싸움을 하는 존경하는(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역) 동기 목사가 달아준 댓글입니다. 현장에서 직접 아픈 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친구의 말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 항상 회색지대에 머물고 있는 제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가 많기에 고개를 떨쿠는 것이 친구가 몸부림치는 사역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진심으로 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사역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한 말 중에 동의라는 우정으로 침묵할 수 없는 한 가지 불편한 시실은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만 없기에 조금의 단상을 남겨 보는 용기를 가져봅니다. 저는 가끔 목회 30년의 현장에서 솟아오르는 감동에 눈물짓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내 곁에 존재해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는 그 분을 간절히 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어떤 때는 그 하나님의 가장 친밀한 곁에 계심이 불편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가야바의 뜰로 가던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가려고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충격적인 것은 그 하나님의 임재가 내가 의도한 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계실 것이라고 믿었던 그 믿음을 산산조각내시고 여전히 그 분은 내 의도와는 상관이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저를 보고 계시는 숨길 수 없는 임재를 보면서 항복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찬미의 영역에서 하나님은 요청된 존재’라는 친구의 의견에 부분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친구의 의견 중에 존재와 관계유비의 하나님은 현장과 사건으로 드러난다는 해석에 저는 박수와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유감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해석 중에 광주에서 세월 호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셨다는 친구의 선명한 그리고 단호한 일침에는 유감스러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친구의 의도를 압니다. 광주에서, 세월호 사건을 빗대며 부분적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이 그 사건을 무지하게 매도하여 마치 일부 불순 세력들이 이용하는 일련의 좌파적 수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비난의 발언이라는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친구의 이 토로에 저 또한 가슴 쓸어내림의 아픔으로 같은 마음을 갖고 있음을 표하며 친구의 분노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제게 너무 조심스러운 친구의 발언으로 인해 유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광주에 하나님의 임재는 없었다는 단정적 표현입니다. 저는 신정론을 언급할 때 확신으로 표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무지해서 신정론의 이해를 완벽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심할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확신으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지식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함정은 ‘절대’를 단어를 남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은 아픈 자들의 마음을 품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하나님 그 분이시기 때문에 찬미합니다. 그것이 저의 부족함을 메우는 또 하나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사족 하나 세월호 유족들을 위한 철저한 진상 규명은 저의 기도 제목 중에 하나입니다. 몇 가지 썼지만 친구의 외로운 싸움과 투쟁에 그럼에도 저는 그의 신들메를 들 수도 없는 놈이기에 친구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