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는 개인적으로 나에게 참으로 친숙하다. 내가 좋아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가 쓴 작품 중에 특히 ‘깊은 강’은 목회의 여정 중에 ‘사회적 영성’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받은 자의 ‘삶 살아내기’ 라는 명제에 대하여 보수적인 프레임을 깨뜨려주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실한 보편적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한 보폭을 넓혀준 스승 같은 책이었다. 이런 도전 때문에 지금 우리 교회 독서 동아리 지체들에게 엔도 슈사쿠의 작품들은 필독 도서로 이미 자리매김을 한 정도이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조조할인(아내가 지독하다.)으로 마틴 스콜세이지의 ‘사일런스’ (원제목: 침묵)를 감상했다. 상영시간 내내 흐르는 무거운 침묵이 영화를 보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같은 메타포가 형성되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너무 무능력한 예수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내지 않고 도리어 흠뻑 빠졌던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지 않지만 가장 큰 아픔을 당하는 자들 옆에서 가까이 그리고 곁으로 다가서서 그들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예수를 보면서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면서 달려온 지난 30년의 목회 여정 속에서 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 ‘바다와 독약’은 개인적으로 신학교 시절 만났기에 현장에서 무감각의 비극에 대하여 항상 긴장하며 사역하도록 만들어 준 교사였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슈사쿠는 정말로 목사로 사는 나에게 여러 가지의 도전을 준 장본인인 셈이다. 영화의 원제 소설인 ‘침묵’에 흐르던 그렇게도 한 번 즈음은 뭔가 하나님이라는 자존자가 보여주기를 원했던 보여 지는 행하심에 끝내 침묵하던 하나님에 대하여 서글픈 심정이 들었던 그 복받쳐 흐르던 감정이 영화에서 시청각적으로 전이되어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감상하는 내내 지울 길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그 분의 ‘다바르’라는 강력한 권위가 목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또 다른 성명(聖鳴)으로 잔잔히 스며들었다. 믿음이라는 형이상적인 함수관계를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이미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존자는 언제나 침묵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자위함이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할 수 있는 전부이다. 현란한 수사학을 동원한 말장난이 아니라 말없음을 통하여 행하신 ‘다바르’ 말이다. 그래서 독일 출신의 의학자이자 글쟁인 막스 피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나 보다. “한 인간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을 때 그의 모든 특성들은 그 실체 속에 중심을 두게 된다.”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p,79) 교회 2층 본당에 동백꽃이 멍울을 터트렸다. 겨우내 말없던 동백이 봄기운 때문에 놀라 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으로 자신을 뽐내는 모습이 인간보다 훨씬 더 인격적인 것 같아 그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했던가! 내가 사는 추운 촌인 제천에도 봄은 성큼 이미 와 있다. 정치는 만신창이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봄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내내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