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2:11-15 제목 : 유불리(有不利)는 신앙의 잣대가 아닙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선교신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그의 책 ‘누가 진리를 죽였는가?’에서 이렇게 일찍이 갈파했습니다.
“이른바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서 기독교와 정치권력과 손을 잡은 결과, 마침내 교회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이 되기에 이르렀다.” (누가 진리를 죽였는가? P,85에서)
필자는 이 글을 2014년 만났을 때 소름끼쳤던 경험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20세기에 활동했던 한 영성 있는 선교신학자의 혜안이 불과 반세기만에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너무나도 적확하게 적중하고 있음을 느끼며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치권력에 대하여 구약의 흉(凶)예언자적인 냉철함을 갖고 비판하고 견제해야 하는데 작금의 조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이 점에 있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교회 공동체가 혹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주군의 방향성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유감을 토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기초가 된 교회 공동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신앙의 방향성이 흔들려서는 안 되고 또 흔들어놔서도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신앙의 방향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오래 전,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보았을 때,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맨 처음 만났을 때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하지만 경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자들이 곳곳에서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아주 교묘하게 신앙의 방향성이나 목적이 그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인위적으로 가공한 세속적 가치와 목적으로 변질한 것을 보면서, 신앙의 유익이 바울이 말한 고난과 십자가가 아니라 성공과 번영의 신학임을 직시하면서 너무 유감스러웠던 생생함이 아직도 필자에게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앙인에게 있어서 영적인 방향성이나 목적은 결코 빗나가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이 제시하고 있는 신앙의 방향성과 목적이 빗나간 비극의 결과를 교훈하고 있음은 주목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5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주목할 구절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디로 가든지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왜입니까? 원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방향성과 목적이 빗나간 이유 때문입니다. 가나안 초기 정복 시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해 승승장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의 곳곳마다 가나안의 거민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선민 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을 받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렇게 은총을 받았던 이스라엘은 보란 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가나안화 되어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결론대로 이제는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복을 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재앙을 만나는 비극의 존재로 급전직하했음을 신명기 역사서 기자는 보고합니다.(11-14절) 빗나간 신앙의 목적이 이런 결과를 빚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 신앙의 목적이 내 개인의 유, 불리에 따라 변질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헛헛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며 하나님 신앙을 저울질하였습니다.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이유가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기 위함(11절 전반절)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농경 사회에 눈에 보이는 만족을 주는 풍요의 신으로 보였습니다. 육체적 쾌락을 주는 육감적 신으로 보였습니다.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40년 동안 주어진 공식대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백성들에게는 바알과 아스다롯은 신세계였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뿐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려면 대전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인 상황의 유, 불리에 따라 신앙의 목적을 얼마든지 변질시킬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고,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교우들에게 종종 전하는 도전이 있습니다. “감정대로 신앙생활하지 말고, 말씀대로 신앙생활하자.”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유, 불리에 따라 신앙의 목적을 변질시키는 행위입니다. 유, 불리는 신앙의 잣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신앙의 목적을 상황의 유, 불리로 계산하여 변질시키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