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만이 복음이다. 장재혁(마제아, 맛디아) 지음 -장재혁 목사님은 성결교회 목회자로 평생을 사역하시다 은퇴하신 후 선교사로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대장간 간
1. 추천서 읽어보기 복음서는 저자의 의도대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저자의 의도가 현장적인 예수 증언인 것을 알게 된다. 마땅히 오늘의 우리의 설교는 바로 그러한 저자의 예수증언에 대한 공감의 언어이어야 한다. 정당하게 우리의 신약지식은 원초적인 저자의 목적과 일치한 탐구로 저자의 예수증언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그간에 자료의 신빙성만을 분석하여 오는 과정에서 저자의 언어증언은 외면하고 그 증언을 그런 언어로 표시한 저자의 의식의 심층을 파헤쳐 보는 소위 객관적인 학문의 요구라고 하는 형사연 하는 탐구(adetective research)의 자세 일변도로 학문하는 궤도에서 거의 100여년이나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저자의 이야기의 리듬을 철저하게 가위질하여 결국은 현대인의 지성과 일치하는 정보의 수용이 전부가 되었고, 그리하여 저자의 인격이 반영되어야 할 이야기의 리듬과 감동과 호흡을 무인격적으로 분해 작업하는 것으로 일관하여 성서학이라고 자변하여 왔다. 이러한 정보적인 지식의 유용성은 조직신학적인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고 병행하여 종교철학 적인 연관성의 규명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의 설교와 메시지의 선포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지혜문학 적이고 종교사유적인 천명을 하는 일에만 매달려 왔다. 그러나 예수의 이야기를 원초적인 저자의 의도대로 감동적인 이야기의 흐름과 리듬을 재현하는 데는 지금까지 참으로 소극적이었다. 그 실 기독교의 출발은 예수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었다. 이제는 예수지식과 예수이해와 예수증언이 원초적인 예수이야기의 리듬으로 다시 조율하고 그 본래의 건강한 색조를 되찾아 생명 적인 건강한 실체를 회복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머리로 인풋하는 정보 (information)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수용하여 인격이 형성(formation)이 되는 (in을 떼여버린 formation)이야기가 존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범람하고 있는 하이테크의 불모가 치유되지 않는 그러한 포스트 모던의 시간대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장재혁(마제아)목사님의 "예수님만이 복음이다"는 바로 그러한 반성으로 지금 등장한 신약학의 새로운 방향제시인 "이야기 비평학"(narrative study)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의 감각은 지극히 정당하고 정확한 판단이다. 예수의 인격과 교훈과 사역으로 돌아가지 않는 기독교 종교학의 사유와 작업은 낭비와 소모이며 이대로 고집하면 끝내 교회의 불모와 사막화를 낳게 할 것이다. 장목사의 예언자적인 외침은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해서 귀담아 들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는 복음의 전부인 예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끝으로 복음서 중에서 특히 저자의 증언 이야기가 이야기형식임을 접근하기 쉬운 요한복음을 통하여 확실한 신앙변증을 실습처럼 가이드라인을 전개하고 있어서, 성실한 독자들은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한평생을 친구로서 그를 지켜 본 사람으로서 그가 늘 말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는 몸의 익은 수련이 "예수님만이 복음이다"를 펴내어 비록 압권은 아니라고 해도 깊은 감동을 일게 하는 저술이 되었음을 우정과 동사자의 심정으로 치하하여 마지않는다.(2001/3).
이상훈 전 서울신학대학교 학장/ 한국성서공회 개역개정 감수 위원장/ 한국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위원회 위원장/
2. 저자서문 읽어보기 성경의 연도로 보자면 6천년이 지나면 안식년인 새 천년이 온다. 이 시대가 오기 직전에 인류는 바벨론 심판이라는 대변혁기를 맞게 된다. 지금이 바로 그 전환기이다. 이른바 바벨론 문명이라는 그 최후 문명의 몰락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계 17,18장). 그뿐만 아니라 그 문명의 특징 하나 하나가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말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속성인 "부와 사치의 추구", 이것이 다름 아닌 심판할 이유로 명시되고 있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에는 현재 전세계 목사의 7할이 모여있고 종교 자유라는 미명하에 세계의 모든 무당들도 성직자로 행세하며 혼음주의자들도 대대적 번식을 도모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는 동성연애자들도 합법적으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만일 이를 거부한다면 피해 보상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 하나마저 추가하여 완전한 준비 자세를 갖추고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막스 웨버의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는 자본주의를 성공시킨 주체다. 그러나 이런 말을 좋아할 사이도 없이 이 문명도 갑자기 몰락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신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부와 사치를 추구하는 죄를 죄로 알기는커녕 덕으로 알고 있는 시대에 교회마저도 이를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부추기고 있어 주님이 우려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모순을 만들고 있다. 종교가 한 지역에서 토속 종교에 혼합 또는 흡수되듯이 기독교는 이단 종교성을 띤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새롭게 하는 기능을 잃은 채 이 문명에 흡수되고 합류하고 다른 부유물처럼 떠내려가고 있다. 그러기에 주님은 거기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말을 하면 문명을 거스르는 반문명적 언동이라고 반박한다. 거기서 나온 자의 맥은 도도히 흐르고 있다. 초대교회를 필두로 예수회 사람들, 모라비안, 퓨리턴, 지금은 중국의 지하교인들이(7천만 추산) 남은 자로 존재해 오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임박한 재림신앙과 그 필연적 결과인 산상수훈적 윤리 현상이다. 산상수훈도 멸망 중에서 건재할 자를 결론으로 삼고 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산상수훈이야말로 현대 문명인이 볼 때 반문명적 언동의 절정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그 무서운 심판에서 '나오는 길'을 말씀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를 주의하라. 그것이 단지 거대한 몇몇 이단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주의하고 말 것이 없다. 이미 이단이라는 선이 그어져 있고 이것이 보호막 구실을 충분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주의하라는 거짓 선지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 사도를 통해 말씀한 교회 내부에서 발생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의 증후군을 총칭하는 것이다. 문명에의 동화라는 외부적 요인과 대조적으로 이것은 내부적 요인으로 떠오르는 현상이다. 오늘날은 재림과 첫째 부활은 물리치고 그 대신 다른 능력과 기술을 개발하는 설교자는 의외로 유명 문화인처럼 높이 뜬다. 부자가 아닌 사람도 부자 되려고 몸부림쳐서 모두 부자군(富者群)에 포함되듯 설교자들도 그들을 속속 모방하고 열심히 추격해 간다. 성공한 부자, 성공한 문화인, 성공한 설교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산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재림의 그 날에 성공하지 못하는 윤리는 윤리가 아니며 그 날에 성공하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그 날에 성공하지 못하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며 그 날에 성공하지 못하는 선지자는 선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악력 밑에 묶인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주의하라는 최후의 신호를 만천하에 보내신다. 뿌!뿌!뿌! 대형화재를 알리는 부자처럼...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적 설교는 어떻게 하는가"하는 것이 오늘날처럼 절실히 요구되는 때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해석과 주장이 다양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교인들도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복음의 확실성과 설교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본래의 교회는 셀처치였다. 이것이 지나간 원시교회 형태인 줄로만 알았다가 중국의 거대한 셀처치가 현대에도 원시 형태대로 존재할 뿐아니라, 이것은 싱가폴과 미국을 거처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의 이런 전통적인 셀처치가, 중국에서 출판된 이 책과 인터넷에 뜬 이 책을 엄청나게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두 가지 우려했던 것, 그것이 오늘에 와서 재현되는 정도가 아닌 더욱 심각한 정도에 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중 첫째는 그 때와 다름없이 교회가 구약 종교로, 성전주의로 회귀해 가고 있다는 우려이며, 둘째는 교회가 헬라화되어 가고 있는 경향, 예컨대 십자가나 부활을 관념화하고 철학화하는 일이다. 이 두가지는 요한복음서를 쓰게 된 동기를 제공한 사유가 된 것이지만, 중국 셀처치에서는 이런 세계 교회의 흔들림에서 쐐기 구실을 해줄 만한 책을 찾고 있었던 차에 가랑비에 해당하는 이 책이나마 소나기처럼 맞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판도 초판으로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특히 셀처치를 하려는 분들에게는 예상 밖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며, 중국에서처럼 이 책은 셀처치 목회자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다지는데 필요한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록에 실린 임상실험 표본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공인된 열두 분의 설교를 무작위로 채택하여 분석한 것이다. 설교 내용 전체도 함께 수록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만한 사정이 있어서 빠뜨리고 말았다. 사실로 말하자면, 이 책은 잘난척하는 나의 작품이 아니고 목회 참회서이며, 이 참회를 가능케 한 주님의 빛이 나를 비추어 드러난 흉측한 치부인 동시에 치료의 기록이다.
재판을 내보내면서 저자 씀
3. 이 책이 쓰여진 동기 목회생활에서 은퇴하고 미국 S지역에서 살 때 목사님들의 방송설교를 매주 듣게되었는데 그들 설교에서 공통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 기도중에 한 분을 만나 내 의견(충고)을 말씀 드렸다. 다섯 가지 중 몇 가지를 시정한 것을 그 다음 방송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후 중국에 보냄을 받아 D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강의하게 된 것도 미국에서 있었던 일과 관계가 있었지만 강의 내용에서조차 그때 충고했던 일과 연관된 것이다. 강의 내용이 중국에서 책으로 발행되게 되었고 야후차이나에도 등재되었고 네 곳이나 전재, 전국에 읽히고 있고, 한국에서도 몇몇 독지가에 의해 발행, 지금은 재판이 출간된 상태다.
다섯가지내용
1. 설교에서 살아계신 분의 말씀이 사라지고 학문의 자료로 전락한 성경은 고전이상의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막상 난해한 성경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이 이렇게 되고 보니 보편적으로 성경접근을 못하게 한 중세기와 다름없는, 말씀없는 상태로 회귀하고 만 것이다. 종교개혁이 천주교가 얼마나 성경에서 이탈했는가에 주안점을 삼았으나 적극적인 면 즉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소홀했다고 하기보다는 개혁이후 발전한 신학이 이 징후를 치유하기는커녕 더욱 변태적으로 병세를 악화시키는데 이르렀다.
2. 설교는 옛날이야기로 끝난다. 구약의 하나님,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화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 하여 설교는 자장가다. 할머니들이 손자를 잠재우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옛날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설교는 더욱 그렇다. 그때에 하나님이 그 모습대로 지금 여기 현재에는 없다. 다만 문화적 연결 고리로 인하여 어설프게 현재와 관계된다. 말하자면 무신론 마르크스주의처럼 하나님은 안 계신 상태에서 설교는 이루어진 것이다.
3. 설교가 너무나 폐쇄적이다. 하나님을 유대교의 폐쇄의 틀에 감금시킴으로 하나님을 다른 하나님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숭배를 하는데 까지 이른 전철을 뉘우침 없이 재현해 가는 설교야말로 말로만 기독교요 설교지 이것은 또하나의 선민, 선택받은 사람들끼리만 독점한 종교행사에 불과하다. 사제들만이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라틴어 전용언어 장벽을 다시 만들고 있다. 특별난 용어, 특별난 예증, 특별난 억양 모두 특별나서 처음 듣는 사람은 거저 신기하기만 하다.
4. 구약은 신약을 위해 있으며 신약 역시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구약 만으로의 설교, 신약 만으로의 설교 즉 복음 없는 설교가 강단을 장악하고 있다. 복음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설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저주받을 다른 복음의 전파다.
5. 복음은 희미하거나 불분명해서 많은 토론을 거치거나 랍비들을 불러다가 구분을 구걸해야되는 것이 아니다. 유대교와 분명하게 다르다. 다른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정치 세력화한 종교의 협박에도 절대 굴할 수 없을 만큼 다른 것. 그래서 바울은 순교했다. 오늘날 바울이 살아있었다면 순교했을 것이다. 아니 순교하기 전에 기절해 죽었을 것이다. 명색이 복음 전파하는 최첨단에 놓인 설교라는 것이 유대교와 다른 종교와 구약과 별로 다른 점이 없어보인다. 복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복음이라는 "다른 복음"이 왕성하여 세를 올리고 있다. 유대교에서 반듯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구원받는다는 말은 옛날에 있었던 독선자들의 주장이였다고? 그렇다면 욕하는 독선 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아닌가 바울사도가 아닌가. 복음은 복음의 개념이 아니다. 부활하여 살아 계신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이시다.
4. 중국에서 시작한 일
1) 신학교에서 강의한 주제는 "예수님이 직접 시범한 복음적설교"다.
초대교회후기(사도의 최후 장수자 요한의 말 년경)에 나타난 교회의 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움직임 둘째는 헬라풍조인 토론과 논쟁의 문화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이른바 철학적 사변적 기독교로서의 타락이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 을 장수하게 하였고 요한 복음을 기록케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필요성보다는 오늘날의 상황하에서 볼 때 당시의 우려했던 한계를 훨씬 초과하고 있다는 느낌에서 볼 때 요한복음은 오늘을 위한 예언적 복음서라고 말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중국에서 강의한 요점
1. 세계교회가 이런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중국교회마저 그런 수렁으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2. 그나마 세계 개신교역사상 최후의 시범교회로 남았다는 한국교회도 이런 점에서는 별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무조건 모방 특히 설교를 그대로 옮기려는 풍조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병이다.
삼자교회 (3000만)쎌교회 (7000만)의 교세가 보여주듯이 세계교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전통적 쎌교회가 보다 깊이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 대해서 세계는 놀라와하고 있고 의문투성이다. 그러나 이상할 것은 없다. 잘못된 복음의 인식, 잘못된 설교가 아무리 거창하게 번쩍 어려도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의 우려했던 점을 그대로 고집해나가는 경우 소박한 교회 앞에서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다.
이 책이 그들에게 높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복음은 무엇이며 복음적 설교는 무엇이 다르냐에 관해서 변별력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예수님이 직접으로 말씀하고 보여주신 표본, 그것 말이다. 개념화한 복음은 무너질 수 있지만 살아 계신 예수님 곧 복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5.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이 말씀한 복음의 확실성과 복음적 설교의 원리
1) 요한복음의 특색은 복음의 독특성과 이 복음을 전하는 수단인 강론과 설교의 원리가 구약예언의 성취보다 더 중요하다는 시각에서 기록한점에있다.
2) 부활신앙의 일환인 재림신앙이 "더디 오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위기에 처해 있을 즈음에 해답을 주려는 시도,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이다. 지금까지도 이 해답은 가장 현실문제로 복음의 혼미를 밝히는 아침 햇살이 되고 있다.
설교에서 재림이 사라진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이것은 부활신앙이 무너진 증거다. 그렇다면 이것은 설교의 와해이전에 복음의 붕궤를 말한다. 복음없는 설교가 교회를 무너지게 하였고 거대한 기독교 국가라는 것도, 복음화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실은 무너진 복음을 기독교문화라는 허울로 포장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즉 복음 없는 설교의 위력은 고작 문화적 설교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3) 뭐니뭐니해도 요한복음의 특색은 로고스이신 예수천명이다. 유대교가 몽학선생으로 복음에 도움을 주었다는데 온갖 정력을 다 쏟아 붓고만 초대교회의 기록들, 모든 복음서와 편지들이 간과할 뻔한 엄청난 복음의 본질, 여분이 아닌 본질을 로고스에서 천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만유의 주 구약도 만물도 예수를 위해서 지어졌고 예수를 인하여 지어졌고 지금도 예수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모든 철학도 종교도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로고스이신 예수를 추구하고 갈망하고 이상시하고 있다. 동서의 교류 없이 이루어진 노자의 도 사상은 로고스의 미숙상태라고 보고 중국어 성경이나 초기 조선말성경에서 로고스를 도로 번역했음도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이것은 번역신학정도가 아닌 요한복음정신과 일치한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은 로고스이신 예수님과 같이 호흡하고 인간과 하나님이신 예수님과의 동고 동락 동행을 즐거워하고 있다. 거대한 공동체의 합창을 요한복음에서 보여주고 들려준다.
6. 본론인 요한복음으로 !
요한복음 1장: 유대교를 멀리 떠나간 복음
1) 우주와 모든 피조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격적 존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모든 토속종교와 철학과 점성가 심지어 식물학자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이런 공통분모를 기초로 로마는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통합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로고스 ,진리다. 요한복음에서는 창세기 기법에 의하여 기록하는 그 일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로고스라고 기록한다. 환경론자들의 비난을 받아온 기독교는 본래부터 환경파궤단체가 아니다. 이런 오명을 벗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로고스이신 예수, 만유주의 본래적 요한복음적 의미를 다시 인식 신앙 관을 정비해야 할 것이다.
로고스 정신에서 볼 때 이방인 불신자 흑인 동양인만을 유대인과 백인에 포함시키는 은전을 배풀것이 아니다. 피조물 모두는 이웃이다. 사랑할 이웃이다. 보이는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창조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말짱 거짓이다. 도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은 그 생활태도가 다시 원시인으로 도라 가게 된 이유도 인간은 만상과 하나라는 사상 때문에이다.현대문명은 자연의 자유로운 파궤를 뒷받침해준 것은 사실이다.
인류는 지금에와 서야 실질적으로 로고스와 싸운 싸움의 대가가 서서히 인류멸망이라는 재앙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서 당황하고 있다. 짐승과 나무를 사랑하라는 설교는 없다. 너무나 인간만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로고스이신 예수가 무시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환경이 염려된다.
2) 1장에서 두 번째 문제는 선지자는 복음에서 무엇인가이다. 선지자는 세례요한으로 끝이 났다. 예수님이 선지자중에 선지자이기 때문이며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더욱 그렇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백성을 위한 선지자이다. 복음 자체가 인간에게 알릴 선지자의 멧세이지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인간을 선지자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였다.
3) 본장, 바돌로메 기록을 통해서 복음은 신비주의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며 종식시켰다. 인간의 끈질긴 신비추구의 장을 끝낸 것이다.
요한복음 2장: 복음의 색깔과 분위기의 독특성
1) 포도주 이적 그리고 결혼식 이것은 복음의 분위기와 칼라가 얼마나 독특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의 일관된 분위기는 십자가가 아니고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서 찾아야한다. 설교가 너무나 십자가 적이며 철학적이며 아니면 명상적이다. 이것 모두는 복음적 칼라에서 벗어난 현상이다.
2) 성전정화작업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성전, 제사장, 법궤, 지성소등 모든 것은 살아 계신 복음이신 예수로 인하여 그 기능이, 사명이 끝났다. 그럼으로 허물어 버리라고 하는 데까지의 선언으로 말씀이 끝맺는다. 기독교역사상 가장 쓰라린 경험은 성전시되는 교회당 건물이다. 예배당을 모두 성전이라 호칭함으로 신자의 의식을 구약 적으로 바꾼다. 복음은 성전을 탈피한 껍질로 보아야한다. 성전주의 하나만으로도 복음을 파궤하는 부정적 요소로 지적하기에 충분하다하리라.
요한복음 3장: 신앙은 교육이 아니다 거듭남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곳 그 이름을 믿는 자...이것은 총론 부분이며 3장은 본론이다. 창세기 기록 법이다. 신앙이란 교육으로 가능하다는 유대교의 통설을 뒤집는 것이 복음이다. 거듭남으로 신앙은 가능하며 새롭게 시작된다. 작동된다. 이 출생이 아니라면 영적 성장은 불가능하다. 시작이 없는 성장, 출생이 없는 자라남은 모두 위선이다. 거짓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조품이 아니다. 거듭남이라는 신생으로 가능하다. 거듭남은 성경 몇 구절을 배워서 영접하는 의례를 거처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현대교회는 속고있다. 그렇게 속아서 신생을 하고 연조만 차면 세례도 중직도 씌워진다. 그러나 얼마못가서 자녀가 아니라는 본색이 드러난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단체와 같은 수준의 윤리 평준화가 발생한다.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한다.
예수님은 거듭남이라는 은총부분을 세 가지로 설명하셨다. 1)구리뱀 앞에서의 체험이다. 2)엄청난 사랑 받음을 충격적으로 이해하고 믿음이다. 3)빛가운데로 나아가는, 성장해 가는 속성의 변화를 받음이다. 거듭남이 없이는 교육으로도 연조로도 성장은 없다.
이와 같이 복음은 인간을 새로 나게 해서 성장케하는것 때문에 니고데모 교육부장관은 자기의 종래의 주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오늘날은 니고데모가 되살아나 열심히 교육주의에 몰입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한복음 제4장: 복음은 예배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1) 수가 우물가의 여인에게 행한 설교는 그의 설교원칙의 표본이다. 설교는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본분으로 해야한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함을 원칙으로 한다. 어떤 선생도 떠난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여 영원히 함께 할수있는분이기에 사람을 그분에게 인도함만이 영원한 인도를 받게 함이 된다.
2) 예루살렘 예배는 끝이 났다. 예루살렘예배를 모방한 예배도 끝이났다. 성전예배도 종말을 고한다. 성전예배적예배도 당연히 끝이 났다. 성전, 제사장, 제물, 지성소, 법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그분을 설명하고 예고하는 알림을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완전한 것이 오면 그것은 페한다.
3) 예배내용도 복음은 혁명적 전환점을 열어제친 꼴이다. 그분과 1대1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개인예배가 철저히 가능하게 된다. 대화, 이것이 예배요 기도다. 성전예배로 돌아간 예배, 교회당 건물중심의 예배만을 예배로, 대예배로 고집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복음에 반역현상. 이것 하나만으로도 복음을, 교회를 무너지게 하기에 넉넉하다. 오호라!
요한복음제5장: 영원한 안식
1) 안식일 규범은 페지되였다.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오셧으면 그를 대망키위한 법규는 사라진다. 임무를 다 했기 때문이다. 매미가 날라가면 굼뱅이 껍질은 버림받아야 된다. 매미가 벗은 껍질을 지고 다닌다면? 그리고 초대교회는 매일이 주님과 동행하는, 매일이 거룩한 날 이였기에 안식일은 없다. 매일 모였지 일주일에 한번 성일에 모인 것이 아니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교회는 다시 주일이라는 안식일을 성일로 복원하였다. 바울은 구약으로 올라가는 운동을 복음을 파궤하는짓으로 규정 펄쩍 뛰다가 순교하였다. 주일은 성일이기때문애 모이는 것은 아니다.
2) 많은 환자중 한사람만 고쳐주고 설교부분에 가서 재림때 첫째 부활에 불러내는 광경을 설명하셨다. 이 설교가 아니면 이 이적 행하심의 의미는 퇴색된다. 이적은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믿다가 재림을 목격 못하고 죽는 억울함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날에 어김없이 베데스다 같은 부활이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에 싸인 첫째 부활 이제는 신비가 아니다 미스테리가 아니다. 부활을 빼버린 복음은 없다. 타락한 현대신학사조는 이 기쁜 소식을 기쁘지 않은 소식으로 바꾸고 이름만은 여전히 복음이라고 말하며 미혹한다.
요한복음 제6장: 거대한 대중적 인류적 성찬식
오병이어 이적같이 큰 이적도 설교가 없으면 무의미하다. 설교는 복음 자체이신 살아 계신 주님으로 종결짓지 않는다면 의미는 강연정도로 추락한다. 이 이적을 행하신 다음 설교부분에 들어가서 놀라운 것은 이외라고 할 성찬식 설교다. 주님의 살과 피는 남녀노유 세계인 모두를 위해 , 재림의 날 문이 닷기는 전날까지 태어난 모든 사람을 위해 주신 참된 양식이며 영생하는 떡이다. 신학자 카알발트도 이 은혜가 이 예정이 전 인류에게 주어졌고 개방되었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7장: 유식한 천치와 무식한 천재
예수님의 형제와 고향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 중에는 배우지 않는 랍비예수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만 그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거듭남이 확실한 무식한 집사가 인도하는 교회가 거듭남을 모르는 유식한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보다 더 교회다움과 흥왕을 확인하는 것은 오늘의 중국교회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했다. 목마른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 영생을 해결하지 못하는 랍비는 랍비가 아니며 음식은 음식이 아니다. 사람을 종교단체에 정치단체에 열광분자가 되게 인도할 수는 있어도 영생의 나라에까지 사람을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식한 천치가 아닌가? 가장 유식한 설교는 사람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자리까지 인도하는 설교다.
요한복음 8장: 죄와 죄성에서 탈출, 과연 가능한가.
간음한 여인이나 다섯 남편을 가진 여인이나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죄와 죄성에서 떠나지 못한다. 이 문제에도 복음이 있는가? 예수님은 해답하신다. 나를 따르는 자는 해답, 그리고 그 이상인 생명의 빛을 얻고 빛나며 비추게도 된다. 거듭남으로 태어나고 예수님과 동거 동행, 하나님과 동거 동행케 함으로 가능하다. 확실히 가능하다. 이런 복음의 해답을 전제도 하지 않는 설교는 정죄아니면 잔소리에 불과하다.
요한복음 9장: 장님과 눈뜬장님
복음은 말한다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장님이라고. 나면서 소경된 사람이 눈을 뜬것은 그다지 중요치는 않다. 그것이 예수(메시아)를 발견하게 하였다는 것과 정상인이된 그 사람이 뜬눈으로 메시아 예수를 발견하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이야기든 설교든 그것이 고상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유식하게 하느냐 무식하게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복음이 되시는 예수를 발견케 했느냐 여부에 달려있다. 무식한 설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0장: 지도자 페지론
이스라엘역사는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로 차고 넘친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가 되고자 간힘 안간힘을 쓰고 겨룬다. 인류역사도 이런 면에서는 같은 격투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격투를 종식시켰다. 이제는 모세나 이사야나 엘리야같은 지도자가 나올 필요도 없고 나와서도 안된다. 선한 목자 유일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목자, 지도자가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만 그에게 무릅꿇고 입을 마출일만 남았다. 선생으로 목사로 교황으로 어떤이름으로던지 지도자라는 존칭과 존경 속에 머무르거나 과시한다면 그것은 유일한 지도자 예수와 겨루는 꼴이 되기에 망할 일만 남게 된다. 시편 2편에서 일찌감치 말해놓고 있다. 급한 진노에 처참하게 망하게 된다. 복음은 인간을 지배하고 노예화시키는 지도자론을 백지화시켰다. 그런줄도 모르고 날고 뛰다가는 월담하는 거짓 목자로 처단 받게 될 것이다. 목자도 지도자도 선생도 하나다. 너희는 형제일뿐이다.놀라운 복음.
요한복음 11장: 사기 당한 재림신앙?
늦어지는 재림에 대한 불만이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 점점 증폭되어 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요한복음은 큰 기여를 한다.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이 대답은 유효하다. 나사로의 부활은 이적이기보다는 이에 대한 대답용이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이와 같이 불러 이르킬자를 일으켜 살아있는 신자보다 못지 않게 늦지 않게 끌어올린다는 말씀이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그날을 맞는 자는 죽음을 영원히 경험하지 않고 부활 체로 변화, 들림을 받을 것이다. 즉 죽어서 그날을 맞으나 살아서 맞으나 별 차이가 없다.
요한복음 12장: 복음에서 선행의 가치 변별법
이 여인이 행한 선행이 복음적 선행의 가치의 독특성을 변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가 존재하는한 이 여인이 행한 일도 줄기차게 따라 다녀야 한다.
구속의 은혜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선행과 봉사로 보답해야한다. 죽을 때까지 해도 물론 다 못갚는다. 그러나 이 일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직접으로 감사와 사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웃에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한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그의 관심사이며 피흘려 구속했다. 뿐만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 그가 친히 만든 것이기에 그를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 모든 것도 사랑해야 한다.
사죄를 위해, 복 받기 위해, 고상하기 위해, 자기과시를 위해 선행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간이 이 여인이 한 일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선행의 최선의 것으로 인정받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이 척도는 지금도 그대로 살아서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겸손과 정도를 지켜 사는데 큰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요한복음 제13장: 새 계명 실천강령
예수님은 사랑을 용서로 즐겨 쓰셨다. 주기도문에서도 그렇지만 세족행사에서도 중심의 용서 깨끗한 용서를,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씻음 받는 것도 일상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보여주신다. 절기에 몇 번 용서받음과 전연 다른 것이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과 하나님께 용서받음은 하나다. 하나님의 큰사랑 받음도 이웃사랑에서 진정한 고백은 성립된다. 이웃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받은 은총을 발견하게된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이 전제되어있고 그것을 자원, 마르지 않는 자원으로 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구약의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첨가한 것이 아니다. 전연 십계명의 방식과 다른 계명이다. 그러기에 이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나의 제자라고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의 표다. 간판이다. 가장 자랑스러운 간판이다. 복음은 십계명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새 계명 하나로, 그리고 새 계명이 빛을 발하는 곳에는 십계명은 옛계명으로 바뀌며 그것은 다시는 인간을 속박하지 못한다.
요한복음 제 14장: 세속적 세력 앞에 무능력한 사랑계명
사랑, 사랑의 계명, 새계명은 세속적 세력 앞에서도 살아남을 만한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이 계명만으로도 전략적 대항수단까지 포함되었단 말인가 그리스문화처럼 정신적 문화적으로만 남을 패배 지향적인 나약한 수단이 아닐까 새 계명에는 과연 숨어있는 또 다른 전략적 대책이 있나? 세계를 정복할 목표만 제시되였을뿐 새계명만으로는 너무나 나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제자들은 서서히 두려움에 쫓기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복음의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두려워말라 근심도 말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아주 가까이서, 안에서 직접으로 일하신다는 것이야말로 믿을만한 최고의 수단이 될 것이며 죽음이 있다고 해도 "아버지 집"이 준비되었다는 것과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는 재림의 극적 전환이 있다는 것, 이것은 최후의 승리의 국면이다. 과거처럼 성전에서 제사장을 거쳐 내게 바라던 시대와는 달리 직접으로 내 이름으로 구하면 즉시 응답하겠다는 것과 성령,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을 가부리엘보다 더 대단한, 항상 개개인에게 머무르게하겠다.평안하라. 이렇게 복음의 심층적 능력,천기를 누설하는데 까지 이른다. 이렇게 안심하고도 복음의 세계 정복전략은 공개되게 된다.
요한복음 15장: 제자라면 응당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다.
포도나무의 존재 가치는 많은 포도를 수확하는데 있다. 제자에게 요구 하는 것도 이와같다. 그 내용은 쉽지만 사람들은 쉽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의 수단방법을 첨가 시키고저한다. 그래서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들어서 포도수확을 주리는 우를 범한다. 항상 예수안에,그와 동행 즉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예수님이 우리안에,내안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는 친구처럼 항상 대화를 지속할 때만이 가지와 나무의 연결상태의 실질적인 것이 이루어진다고 보셨다. 수가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짧은 시간에 해결하였던가. 이 해결이 그 여인의 5개년 사업계획에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다 대화는 예배요, 기도요, 능력의 교류요, 고압전류의 흐름이다.
복음은 능력이다. 이 능력은 많은 성과를 거두게 한다.
요한복음 16장: 제자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담대하라 이것뿐이다. 이것을 설교해야한다. 모세에게도 여호수아에게도 기드온 300명에게도 바울에게도 위기 때마다 부탁한 것은 이 한가지뿐이다.
두려워하는 제자, 장군은 제거대상이 된다. 새 예루살렘 문턱에까지 다닫았을때에도 두려워하는 자는 제거된다. 아 !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최후의 기도제목은 ?
공생애를 마감하면서 그의 장엄한 기도가 공개된다. 그렇다면 그럴 때 즈음해서 그분의 가장 높은 관심사는 무엇이며 죽어도 안심할 수 있는, 남겨놓은 성취 그것은 무엇인가. 그의 구한 것은 반듯이 이루어져야 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루어 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이다.
신인 일체다 신천신지에서나 이루어질 법한 그 이상甄? 그것이 제자들에게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스도, 부활한 주님이 인간과 함께 거주하며 동행하며 동락하며 친구로서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꿈같은 얘기다. 이 기도는 꿈이 아니다. 초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게주신자 제자에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제자의 복음, 선교의 복음, 천하정복을 위한 복음의 능력의 실체가 되었다.
요한복음 18,19장 : 수난은 부활의 뒷장이다
수난장은 부활승리의 앞장이며 이면장이다. 또 하나의 장에 밀접히 붙어있음이 불가피한 상태다. 하나를 소홀히 하거나 부정하고서는 또 하나의 전면부정에 직면하게 된다. 예수의 생애를 십자가로 종결짓는 것은 무신앙 무신론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반대로 부활한 예수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이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전자의 폐단을 생산하는데 학계와 교계가 치우친 쪽으로 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사순절이다 뭐다해서 고난은 40일씩이나 기념하면서 부활은 부활주일 하루로 종치고 만다. 그런 부활주일마저 문화적 부활정신을 힘껏 앙양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복음에서, 복음 적인 설교에서 멀리 떠나가고 있다.
요한복음 20장: 부활은 복음의 등불이다
부활하심과 성도의 부활할 것을 빼놓고는 성도가 기뻐해야 할 일은 존재할 수 없고 복음은 단번에 비보로 바뀐다. 올바른 부활신앙이란 네 가지다. 1)예수님은 부활하셨다. 2)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 3)살아 계신 예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4)재림의 날에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부활한다. 이것 중에 하나만 믿어도 부활신앙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그것은 불완전한, 미숙한 속임수에 가까운 부활신앙이 된다. 더욱이 재림신앙은 부활신앙의 일부임에랴. 부활신앙이야말로 복음의 등불이다. 이 등불이 교회에서 설교에서 꺼저가고서야 교회다운 교회, 설교다운 설교, 선교다운 선교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맛이다. 특색이다.
베드로의 고백 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바로 부활신앙이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란 부활신앙위에 교회를 세움을 의미한다. 음부의 권세가, 세속권세가 교회를 흔들어 대는 원인을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
요한복음 21장: 선교는 계명이 아니다 복음이다
베드로의 간단한 행위만으로 일백쉰세마리 대어를 낙꺼올린 것처럼 선교는 수행할 계명이 아니라 복된 소식이며 이적체험의 연속을 보는 기뿐 일감이며 은총이다. 세계정복은 이렇게 이루어저간다! 스데반의 죽음이, 미소 한번에 바울이라는 대어가 걸려 올라 올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작은 몸짓하나가 세계를 움직이고 선교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천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비밀이 아니다. 선교란 이런 복된 소식이다.
6. 부록: 설교, 이럴 수가 !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 설교만 수록한 책에서 무작위로 택한 설교 12편, 이것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설교라고 해야 격이 맞는다. 이런 설교를 본 강의 내용을 토대로, 예수님이 말씀한 복음의 내용과 복음적 설교원리를 투과시켜 분석했다. 결과는 한마디로 놀랍다! 이럴 수가! 거의 전부가 복음에서 이탈되었거나 함량 미달이다. 종말이라는 선고를 받은 사색(死色)에 가득찬 현대 문명에 시드러저 가는 인간에게 다시 문명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문화 강연 같은 설교로 그들을 더욱 취하고 잠들게 하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이렇게 탄식하는 나라는(저자)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30년동안 이런 설교만을 하다가 깊은 잠에서 깨여나니까 말년이 되었다. 이 탄식은 나의 개인적인 참회가 포함된 고백문으로, 이렇게 미운 오리처럼 태어났다. 그러나 이 원고를 본 출판사에서 또 하나의 부제를 올리게 된 것. "복음없는 설교가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 이 부제를 보는 순간 또 하나의 제목이 떠오른다. 복음 없는 설교가 교회를 죽이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살리자. 바로 가자. 이 조그마한 책은 이렇게 절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