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씨가 2008년에 쓴 책으로 창비에서 출간이 된 책입니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여자로서 엄마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우리 어머니들의 삶과 사랑을 절절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신경숙의 소설『엄마를 부탁해』. 2007년 겨울부터 2008년 여름까지 '창작과비평'에 연재되어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작품으로, 작가가 <리진> 이후에 펴내는 여덟 번째 장편소설이다. 연재 후 4장으로 구성된 원고를 정교하게 수정하고, 100여 장에 달하는 에필로그를 덧붙였다.
소설의 이야기는 시골에서 올라온 엄마가 서울의 지하철 역에서 실종되면서 시작된다. 가족들이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추적하며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과정은 추리소설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전개된다. 늘 곁에서 무한한 사랑을 줄 것 같은 존재였던 엄마는 실종됨으로써 가족들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더욱 소중한 존재가 된다.
각 장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자식들과 남편, 그리고 엄마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딸, 아들, 남편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펼쳐질 때마다 가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각자가 간직한, 그러나 서로가 잘 모르거나 무심코 무시했던 엄마의 인생과 가족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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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엄마의 모습은 '어머니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엄마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에피소드들은 우리 모두의 엄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은 '어머니'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와 묘사로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간다. 늘 배경으로 묻혔던 엄마의 삶을,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여자로서의 삶을 내세우고 있다.
---------- 위의 책을 읽고 김영봉 목사가 쓴 책이 엄마를 부탁해입니다.
“가정과 교회, 나아가 이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모성적 사랑이다!”
베스트셀러 [사귐의 기도]의 저자 김영봉 목사와 함께 읽는 [엄마를 부탁해]
희생, 사랑, 이해, 용서, 모성을 주제로 한 다섯 가지 이야기!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담고 있는 ‘모성’의 가치를 성경적으로 풀어내고, 진품 사랑의 결핍이 한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망가진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일과 성공을 좇아가느라 가정은 뒷전인 40-50대 가장, 남편의 사랑을 잃고 쇼핑중독에 빠진 중년 여성,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어머니에게 푸는 10대 소년, 모든 걸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충만한 사랑에 마음만은 부자였던 아들!
저자는 이렇듯 목회 현장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에 소설이 주는 메시지, 말씀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해석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시켜 ‘모성적 사랑’이라는 우리 사회 최고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1장에서는 바쁜 일상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가정에서조차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회 풍토 속에서 희생하고 섬기는 삶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어머니의 진품 사랑임을 역설하고, 이 진품 사랑만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망가진 인생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3장에서는 엄마에게 ‘엄마’의 역할만 강요했던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반성하게 만든 소설의 메시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이 한 인간 안에 있는 다양한 모습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로서’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던져준다. 4장에서는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연약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용서를 실천할 때 진정 자유로워지는 사람은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용서한 사람 자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마지막 5장에서는 모성적 사랑의 모체가 되는 하나님의 모성을 재조명함으로써 ‘모성’은 사라지고 강압하고 훈계하는 ‘부성적’ 지도력만 남은 가정과 교회,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선명한 그림을 그려 보여준다.
‘문화 영성 프로젝트’로 영성적 설교의 지평을 열다한국 교회에 ‘영성적 설교’라는 새로운 롤모델을 제시한 김영봉 목사는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보편적 설교 방식 대신 한 가지 큰 주제를 붙잡고 이야기 식으로 설교를 전개해나가는 대표적인 설교자다. 이 때문에 그는 설교 도중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대화 형식의 논법을 자주 사용한다. 청중의 입장에서 질문을 제기하고 설교자 스스로 여기에 답하면서 회중의 생각을 자극하고 유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설교자는 청중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을 해소하는 한편 설교자와 청중이 동일한 고민을 가진 구도자라는 인식을 회중들에게 심어준다.
다른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그가 설교 주제를 선택하는 데는 분명한 원칙이 있다. 설교를 듣는 회중과이 시대에 적합한 주제인가? 얼마나 긴급한 주제인가? 성경 말씀에 근거한 본질적인 주제인가? 성도들을 변화시키고 회중의 믿음을 심화시킬 수 있는 주제인가?
세속 문화로부터 기독교 영성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찾아 접목하는 이른바 ‘문화 영성 프로젝트’도 이러한 고민과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6년에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2007년에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가지고 설교함으로써 교회 안팎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그가 이번에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프레임을 통해 가정과 교회, 이 사회에 ‘모성적 사랑’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엄마를 부탁해]가 보여준 우리들의 자화상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는 단순히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과 자식들의 이야기이다. 한 평생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도 제대로 인정 한번 받지 못한 박소녀의 인생이 곧 우리 어머니들의 인생이고, 엄마의 골수를 다 빼먹고 자란 뒤에는 제 삶에 바빠 소중한 이를 잊고 살았던 박소녀의 자식들이 곧 우리들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결국 신경숙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 잊고 지냈던 사랑, 무시하고 살았던 사랑, 언제까지나 있겠거니 하며 당연시했던 사랑을 다시 찾아 나서라고 우리의 등을 떠민다.” 그리고 저자가 이 소설을 모티브 삼아 가정의 달 연속 설교를 시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을 두고 참으로 어려운 책읽기였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소설에서 쉬이 놓여나지 못했고, 결국 이 소설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 회한과 반성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연속 설교를 시작했다.
[엄마를 부탁해]가 우리로 하여금 부모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얼마나 불효했는지 깨닫게 만들고,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를 반성하게 하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게 했다면, 이 책은 소설의 메시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어머니 사랑’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게 함으로써 모성이 실종된 가정과 교회, 나아가 이 사회가 회복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설득력 있게 풀어놓는다.
모성적 사랑이 충만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저자는 이 책에서 희생, 사랑, 이해, 용서, 모성이라는 다섯 가지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정수는 가정과 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성적 사랑에 대한 유려하고 깊이 있는 성찰이 돋보이는 마지막 장이라 할 수 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앞의 네 가지 화두는 결국 ‘모성의 회복’이라는 주제 안에 자연스레 수렴된다.
저자는 가족끼리 나누는 참된 사랑은 가족 아닌 사람에게까지 흘러가는 특성이 있다고 말한다. 만일 사랑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면 그 사랑은 병들었거나 불완전한 것이다. 진정한 모성적 사랑은 가정이라는 담을 넘어 바깥으로 흘러넘치게 되어 있다. 이는 소설 속 박소녀의 예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소녀의 모성적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은 사람을 만나면 즉시 그 사람이 그녀의 손자손녀가 되고, 아들딸이 되는 예가 곳곳에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모성적 사랑의 특성이고, 서로가 서로를 부탁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사회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러한 사회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과 같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모성적 사랑으로 돌보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김영봉
김영봉 김영봉은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M.Div.), 달라스 소재 SMU의 퍼킨스 신학대학원,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Ph.D)에서 신약 성서와 기독교 기원에 대해 연구했으며, 협성대학교 신학과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신약학과 관련된 여러 번역서와 저서를 출간했고, The International Bible Commentary(Liturgical Press)에 빌레몬서 주석을 쓰는 등 다양한 학문 활동을 해 왔다. 지금은 미국 버지니아 소재 와싱톤한인교회(
www.kumcgw.org)에서 목회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다 빈치 코드는 없다](이상 IVP) 등이 있다.
충남대학교 경영학과 졸업.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신학 시작.
미국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원에서 서사학위.
캐나다 해밀톤에 있는 맥매스터대학교대학원 종교학부에서 신약신학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이해를 위한 신약성서 연구], [공관복음서 기적의 의미], [예수의 치유이적 해석]등 여러 책을 번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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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희망입니다, 그리고
--김영봉 목사의 <<엄마가 희망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믿을 만한 도구는 문학과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문학과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적인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그 문제들을 붙들고 씨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6, 7)
문학과 신학의 만남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그려지지 않는가? 저 쓸쓸한 마음의 풍경이. 도종환 시인의 시구를 읽으며 마음 한켠에 건들바람이 불어온다. 눈길을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성찰의 계절에 김영봉 목사의 <<엄마가 희망입니다>>를 읽는다는 것은 마침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맞은 격이다. 이미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울리고 있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전거로 삼아 그는 우리 내면의 풍경과 삶의 방식을 비추어 볼 거울 하나를 빚고 있다. 어머니/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무한한 공감의 바다이다. 세상에 불효자식이 아닌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자애롭지 않은 엄마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회고의 자리에서 ‘엄마’라는 단어가 발화되는 순간 우리의 심금은 마치 자명고처럼 저절로 울리기 시작한다. 신경숙의 작중인물인 ‘박소녀’는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나타내는 제유(提喩)이다.
<<엄마가 희망입니다>>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담긴 서브텍스트를 신학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읽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 속에 담긴 김덕용의 그림은 또 다른 차원의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화가는 나뭇결무늬 속에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나뭇결은 마치 세월의 켜처럼 고르지 않다.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은 박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담담할 뿐,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슬프고 또 고맙다. 김영봉, 신경숙, 김덕용. 이들 세 사람은 한 텍스트 속에서 수굿하게 만나며 독자들을 그 만남의 자리로 끌어들인다. 그대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며.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 교우들에게 선포한 말씀에 살을 붙인 것이다. 이 시리즈 설교를 하기 전에 그는 교인들에게 신경숙의 소설을 읽도록 했다 한다. 회중들은 설교를 듣기 전에 이미 충분히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이 아닌 소설을 텍스트로 삼아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성경이 메인 텍스트로 봉독되었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결정짓는 것은 소설의 내용이라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설교는 성경에 대한 꼼꼼한 주석에 근거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김영봉은 문학과 예술도 진리를 추구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당연한 이야기도 당연하게 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이미 영화 <밀양>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연속설교를 한 바 있는 김영봉 목사는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통해 신학의 언어를 풍부하게 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서재가 아닌 예배의 자리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조심스럽다. 특히 그것이 문학의 소재가 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자칫하면 감상성이나 자기 연민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 자아가 녹아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자기 연민이라는 함정을 벗어나 보편적 생의 진실로 나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김영봉은 신학의 언어를 통해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길을 모색한다. <<엄마가 희망입니다>>는 <잊은 것은 잃은 것이다>, <사랑은 늘 배고프다>, <누구나 마음은 같다>, <용서가 길이다>, <모성이 희망이다>라는 제목의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땅의 박소녀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치매를 앓고 있던 박소녀 할머니는 생일상을 받으러 상경했다가 서울역에서 실종되고, 어머니를 찾기 위한 자식들의 백방에 걸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김영봉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을 “엄마를 잊고 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과 등치시킨다.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이 문장의 속뜻은 박소녀는 실종되기 전부터 이미 가족 모두에게 실종된 상태였다는 말이겠다. 어머니가 사라진 후에야 자식들은 비로소 서울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한 자신들의 삶에 난 큰 공백을 본다. 어머니의 실종은 어머니를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영봉은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바로 ‘실종된 박소녀’라고 말한다.
1978년 <<씨알의 소리>> 5월호에는 함석헌 선생의 아내 황득순 여사의 부음이 실려 있었다. 함선생은 “나야 뭐”라는 제목을 붙인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내를 추억하며 “아내는 누가 지어주었는지 모르나, 이름자대로 순(順)이었습니다. 그저 순종해 산 일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파킨슨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주검 앞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나의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대신 받은 것이요, 나의 생애의 마지막 손질을 하기 위해 희생이 된 것이다.” 입관을 마친 후 자녀들의 회고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내의 별명이 “나야 뭐”인 것을 알았다 한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으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이다. 이 땅의 ‘박소녀’들의 또 다른 이름은 어쩌면 ‘나야 뭐’ 혹은 ‘순順’일지도 모른다. 함석헌이 아내의 삶과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을 읽어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영봉은 고난을 끌어안는 박소녀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이런 관점은 감동적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누군가의 희생에 박수를 보내면서 그를 희생시켜온 구조를 온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과거에 엄마들이 홀로 져야 했던 짐을 모두가 나누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희생자들에게는 이런 당부를 덧붙인다. 첫째, 지금 당하는 희생과 고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그럴 상황이 되면 기쁘게 벗어나라. 둘째, 희생과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동안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대상을 찾으라(43쪽 참조). 매우 실제적인 충고이다.
“그 앞에서는 무참히 무너져 내려도 좋은 사람,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나를 탓하지 않고 내 모든 원망과 투정, 응석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내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오물을 다 받아주고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48)
박소녀에게 이런 사람은 남편도 자식도 아닌 이은규이다. 빼앗겼던 밀가루 함지를 찾으러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찾아간 이은규의 집에서 박소녀는 난산 중인 그의 아내와 노모를 발견한다. 박소녀는 얼떨결에 산모를 도와 아기를 받아내고 도둑맞았던 밀가루로 급히 수제비를 만들어 온 가족을 먹인다. 나중에 그 산모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는 틈나는 대로 그 집을 찾아가 엄마 잃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곤 한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이은규는 삼십 년 동안이나 박소녀가 찾아가 쉴 수 있는 그늘과 샘물이 되어주었다. 박소녀에게 이은규는 고단한 생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뗏목이었다. 김지하는 “갇힌 삶에도/봄 오는 것은/빈 틈 때문”(<틈>)이라 했다. 그 빈 틈이야말로 생명을 싹 띄우는 파랑바람이 불어오는 통로가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은규가 사는 ‘곰소’가 박소녀에게 일종의 ‘성소’라면, 기독교인들의 성소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지당한 말이지만 이런 발 빠른 치환이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
김영봉은 <사랑은 늘 배고프다>라는 장에서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고 정작 자신은 텅 비어버린 어머니에게 집중한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위해 한없이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도 “이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다. 저자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런 사랑을 ‘진품 사랑’이라 일컫는다. 부부 간의 관계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든 이해가 개입되고 조건이 개입되는 순간 그 관계는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보험금을 타내 강남에 살고 싶다는 욕망에 굴복해 친구를 시켜 엄마와 누나를 살해한 어느 청소년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떤 벼랑 끝에 서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동하는 공포가 스멀스멀 일상에 스며들어 우리 의식을 옥죄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갑각류처럼 마음에 단단한 울타리를 두르고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유인하는 상황과 시스템의 영향력을 가리켜 ‘루시퍼 이펙트’라고 말한다. 루시퍼들이 횡행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 인간됨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존중받고 사랑받았던 기억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질병은 ‘권리’를 찾느라 ‘희생’을 잊고, ‘평등’을 구현하느라 ‘섬김’을 잊고,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느라 ‘자기희생’의 덕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99)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사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그런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머니,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인 이름이지만 우리는 그 어머니도 자신만의 꿈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누구나 마음은 같다>라는 장에서 저자는 누구도 어떤 역할로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런 깨달음은 계시처럼 찾아온다. 소설 속의 큰 딸이 어머니 집에 잠시 들른 어느 날,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동생 있는가?”라는 음성이 들린다. 엄마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더니 “오빠! 오빠!” 하며 찾아온 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다. 딸은 이때 처음으로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고, 자기만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박소녀.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 혹은 아이들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녀에게도 남편이 필요했고, 아버지도 필요했고, 엄마도 필요했습니다. 오빠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습니다. 그녀 안에는 어리광 부리고 싶은 어린아이도 있었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눈물짓는 문학소녀도 있었으며, 봄바람에 마음 설레는 처녀도 있었고, 멋지게 차려입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중년 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110)
김영봉은 자연스럽게 자기의 어머니를 기억해낸다. 외항선을 타고 돌아다니던 삼촌의 옷가방을 정리하다가 나온 화사한 여자 옷을 입어보며 즐거워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지만, 그 낯선 모습이야말로 어머니가 억누르고 있던 내면 풍경의 일부였음을 이제서 깨닫는 것이다. 어머니뿐인가? 세상의 어떤 존재도 하나의 역할 속에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 늘 어련무던하게 살아가는 이들 속에도 왕자 유목민 전사 요부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전체를 이루는 일부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을 항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이 가리키는 바도 그것일 것이다.
<용서가 길이다>라는 장에서 저자는 용서의 문제를 다룬다. 남편과 손위 시누이는 박소녀의 삶에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었다. 늘 밖으로만 떠돌면서 가정의 모든 짐을 아내에게 떠넘겨버린 남편, 일찍 혼자가 되어 동생 집 근처에 살면서 시어머니 노릇으로 박소녀를 괴롭혔던 시누이. 그들은 박소녀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자기들의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자각한다. 김영봉은 이 대목에서 용서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역설한다.
“한 사람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마음에 쌓인 분노를 푸는 길은 진실하게 용서를 비는 것밖에 없습니다. 또한 용서를 구하는 행동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을 안겨줍니다.”(171)
“용서를 할 때 가장 큰 덕을 입는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 자신입니다.”(176)
저자는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두 가지 비결을 말한다. 첫째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180)이고, 둘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용서를 기억하는 것”(183)이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 이미 사라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아직 상처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에게 용서를 요구한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용서를 통해 마음의 부담을 해소해 버리기보다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스스로 성찰해가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법(홍세화)이다. 종교적 담론이 때로는 불의에 대한 의분을 억누르고, 우리를 감상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기에 하는 말이다.
모성과 부성의 조화
<모성이 희망이다>라는 마지막 장은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괴테의 견해를 내면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큰딸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마리아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큰딸은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흡수하여 새로운 생명을 낳은 십자가의 기적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어머니가 보여주는 사랑의 원형임을 깨닫습니다.”(209)
물론 김영봉은 모성적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바깥으로 흘러넘쳐야 한다고 말한다. 박소녀는 그런 사랑의 전범이다. 하지만 버림받은 아이들을 거두어 주고, 자식들이 보내주는 돈의 태반을 소망원에 보낼 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서 아이들을 씻기고 청소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박소녀에 대해 세상은 무심하다. 박소녀의 실종은 모성이 증발된 사회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라고 말할 때 저자의 언어는 결기에 차있다. 내친 김에 그는 인정의 사막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한 치유책을 제시한다.
"보수든 진보든 관리보다는 돌봄, 감독보다는 살핌, 처벌보다는 격려, 통제보다는 관용, 정리보다는 조화, 효율보다는 개성, 질서보다는 자율을 미덕으로 삼는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223)
‘가정에서의 모성 회복’과 ‘사회에서의 모성 회복’을 강조하는 그는 ‘교회의 모성 회복’도 언급한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지도력이 근본적으로 모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성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교권 체계를 만들어온 교회가 오늘의 문제를 낳고 있다면, 교회의 미래는 모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견해에 동감한다.
하지만 모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다소 염려스러운 게 사실이다. 저자는 부성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부성에 치우쳐왔던 우리 사회 혹은 교회의 균형을 모성을 통해 바로잡자는 뜻에는 공감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을 지배하는 가치가 부성적 가치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세심한 성찰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사회에는 번듯한 직장과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어른의 몸을 입고 돌아다니는 소년들이 많다. 어떤 사회학자는 이 시대를 가리켜 ‘유아적 엄살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카리스마적 존재에게 매이고 싶어하는 의존 심리는 또 어떠한가? 강박감과 외로움을 이겨내기 어려워 술이나 마약 혹은 오락거리에 탐닉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할 모델로서의 ‘아버지’가 아닐까? 루브르 박물관에서 17세기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공소의 성 요셉과 어린 예수>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익숙하지만 낯선 정서가 떠오른다. 예수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림, 그것도 아버지의 일터에서 공구를 다루는 아버지를 돕느라 촛불을 밝혀든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예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구나’ 하는 이상한 안도감 말이다.
문학 작품 속에 녹아든 메시지를 찾아내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그것을 재해석하고 확장한 김영봉의 시도가 한국교회의 담론의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엄마가 희망입니다’라는 말 뒤에 주눅 들린 목소리로 슬쩍 덧붙인다.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