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사역을 마친 늦은 저녁 시간, 서재의 사위(四圍)가 적막하다. 아니, 내 마음이 적막하다는 말이 더 정직한 표현 같다. 설 명절 연휴가 이어지는 주일을 섬기면서 느끼는 소회가 침침하다. 현장 목회자로 수 십년을 섬겼지만, 작금 코로나 사태가 끝난 이후 교회의 자화상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여백보다는 부끄러운 민낯을 여지없이 볼 수 있는 적나라함이 더 많이 표출되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신앙생활은 종교활동이 아닌데, 취미활동이나 레저의 일부가 아닌데 그렇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진 오늘의 교회가 많이 아쉽다. 이런 상황을 목도하면서도 이제 이런 상태가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하며 침묵하고 있는 목회자의 현실도 안타까운 것은 매일반이다. 코로나가 교회를 직격한 그 후유증은 이론으로 설명 불가다. “지나치게 안전한 신은 우리를 경계지역의 거주자로 만든다. 역으로 말해서, 경계지역 거주자들이 하나님을 지나치게 안전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캐나다의 뉴라이프 커뮤니티 목회자인 마크 뷰캐넌의 일침을 떠올려보는 주일을 보냈다. 이제 내가 섬기는 교회도 ‘크리스티아노스’들이 아니라, 지나치게 안전한 하나님을 요구하는 경계지역 거주자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 같아 아프다. 오늘 주일 에배 회중 기도를 맡은 자매가 기도한 울림이 아직도 내 귀의 이명으로 들리고 있다. “하나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갔고, ‘서라’ 하면 섰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순결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귀기울여 순종하며 따라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자매의 기도가 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도 진정성이 있는 울림의 기도로 접목되기를 응원하며 아멘해 본다. 오늘 주일은 왠지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