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교회(世認敎會)는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가 되자는 목회 철학을 밑힘에 두고 세워진 교회다. 우리 교회 창립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던 어떤 이가 우리 교회의 탄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되어야지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가 되면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를 대상으로는 가급적 말을 줄인다. 교회론의 1,2,3을 재삼 설명한다고 들을 리 만무고, 또 그런 수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세인교회는 1년 두 번 대외 섬김 사역을 한다. 전반기에는 재정 사고로 인해 설화(舌禍)가 나기 전까지 위안부 어르신 돕기를 지속했다. 더불어 후반기에는 관내 소녀들을 대상으로 위생용품을 지급하는 기부금 지원과 겨울 나기가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재정적인 지원 사역을 감당해 왔다. 이 사역은 세인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성하기에 행하는 사역이 결코 아니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라고 일갈한 본회퍼 목사의 교회론에 대한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행하는 세인 교회의 사역이다. 지난 주, 기부금을 전달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방문했다. 마침, 새롭게 관내 동사무소로 발령받은 동장은 직전 교회에서 사역할 때 주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신자라는 것을 알고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설상가상으로 선교부 회계 권사께서 그 지체에게 방문 시간을 고지했다는 전언을 받고 본말이 전도될까 몹시 난처했다. 하지만 사역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약속된 시간에 동사무소에 방문하자 아니나 다를까 부하직원들이 동장실로 안내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단히 정중하게 고사했다. 내가 온 것은 동장실에 들어갈 만한 일이 아니라고 부하직원들이 난처하지 않게 최선의 예의를 지켜 고사했다.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직원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목사님, 매년 행하시는 이웃 사랑은 관내에 귀감인데 사진을 찍어서 미담을 알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직원이 말하는 의도를 너무 잘 알았지만, 역시 정중하게 손사래쳤다. 주님이 의도하셨고, 명령하신 나눔 사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산불 현장이나 수재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고 오는 정치인의 수준으로 목사가 자리매김한다면 그건 수치이자 치욕이다. 그런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경계할 일은 본말전도다. ‘本’이 ‘末’이 되고. ‘末’이 ‘本’이 되는 것은 전형적 세속의 패러다임이다. 목사가 눈을 크게 부릅뜨고 경계 또 경계할 일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두렵도록 치밀하시다. 적어도 이강덕 목사에게는 그렇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성탄주일을 앞둔 예비일, 새벽 예배 큐티 본문이 요한일서 4:7-15절이었다. 소름끼치는 마음으로 11절 앞에서 멈춰 섰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경계하자. 타인을 위한 나눔과 사랑 실천은 사진찍기용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