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신학생 시절, 교육전도사로 받는 월 사례금 10만 원으로 책도 사야 했고, 기숙사 식권도 사야 했기에 점심을 굶기는 다반사였다. 지금은 ‘성결인의 집’이라는 괴물이 들어서서 사라진 내게는 잊지 못할 기도의 동산 성주산이 있다. 당시 550원이었던 식권을 사지 못해서, 성주산으로 올라갔던 기억은 지천이다. 육체를 만족시켜 줄 점심 식사는 굶어도 영적으로는 굶지 말아야 하겠다는 제법 순수한 마음을 갖고 그 시간에 성주산에 올라가 폼잡고 기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흑석동에 살던 친구가 공강이 있던 여느 날, 자기 집으로 점심 식사 초대를 했다. 친구의 집에 들어가자, 어머님 권사님이 아들 친구 전도사가 왔다고 환하게 웃으시며 환영해 주셨다. 당신의 정성이 들어간 된장찌개를 끓이시고 고봉밥을 주셨다. 나물무침, 생선조림 등등 진수성찬을 만들어 식탁에 내놓으셨다. 그리고 아들 친구인 새파랗게 젊은 교육전도사를 교역자로 예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도사님, 우리 집에 와서 감사하고. 찬은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들고,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나는 그날 먹은 된장찌개보다 지금까지 더 맛있는 된장찌개를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지극한 사랑이라는 양념이 담겨 있었기에 말이다. 뇌물(?)도 주셨다. 친구의 집을 나오는데 봉투 하나를 건네셨다. 거금 50,000원이 들어 있는 엄청난 액수의 물질이었다. 식권 100장 가까이를 살 수 있는 내게는 오병이어였다. 나는 친구 어머님 권사님이 주신 물질을 들고 서점으로 달려가 너무 읽고 싶었던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샀다. 그 책은 지금도 나의 최애 도서 중에 하나다. 펜데믹 기간, 설면했던 친구 목사를 만났다. 된장찌개를 끓여준 어머니의 아들이다. 친구는 진보적 사역자였기에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진보 교단으로 옮겨 목사 안수를 받고 평생 노숙자들을 섬기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사역을 했다. 교단도 다르고 사역의 내용도 달랐지만, 친구와 나는 줄곧 연대했다. 옆에 있는 다른 친구 목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목사가 이 목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건 수수께끼 중에 수수께끼야!” 친구는 어려서 심장 수술을 했다. 그로 인해 신학교에 들어와 목사까지 되었지만 육체의 가시로 인해 평생을 긴장하며 살았다. 나는 친구가 얼마나 숨 가쁜 인생을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몇 주 전, 소원(疎遠)했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 목사, 내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얼굴 한 번 보았으면 좋겠어!”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12월이라 목양 사역 스케줄이 교회를 비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만사를 제치고 친구 집을 찾았다. 곱고 고우셨던 어머님 권사님을 수십 년 만에 뵈었다. 한사코 만류하는 절을 드렸다. “목사님, 너무 반가워요.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 목사님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염치없지만 안수 기도 부탁할게요.” 가장 간절한 사랑을 담아 권사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스플랑클니조마이’의 마음을 갖고 눈물로 기도해 드렸다. 끝까지 건강하실 수 있도록.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 된 친구의 말을 듣다가 무관심했던 내가 너무 미워졌다. 사랑하기를 중단했던 내가 참 나빴다.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으로 인해 노숙자들, 도시빈민과 동고동락하였던 친구, 이제는 늙고 병든 몸이기에 자신 하나 간수 하기 힘들었던 친구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나를 질책했다. 그리고 다짐해 본다.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말자고. 사랑하기보다 더 우선하는 목사의 그 어떤 다른 것은 없다. 새결교회 이상선 목사가 끝까지 건강하게 잘 이겨주기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예비일 아침에 중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