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이 시작되는 12월을 앞두고 있다. 아주 깊이 들여다보면 12월은 삶의 연속선상에 있는 또 다른 시간인데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12월에 의미를 부여한다. 주어진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또 다른 한 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달이라 범인(凡人)들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 같은 맥락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언제부터인지 12월이 그냥 12월이 아니라, 조금은 더 신학적 구체성을 띤 12월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목양의 현장에서 당해 연도와는 또 다른 것을 계획하고 설정해야 했던 지난 젊은 날의 쳇바퀴를 돌리는 듯한 12월과의 만남이 아니라, 내게 선물로 주어졌던 1년이라는 시간을 잘 살았는가에 대한 복기다. 아마도 이렇게 12월의 패러다임이 변화된 것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감회가 육십을 넘기면서 훨씬 더 강하게 체감되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싶다. 지난 주간, 목회계획을 위해 머물렀던 기도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숲길이 잘 조성된 명상의 숲이 있었다.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 들렸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또 기도하고 묵상했다. 이렇게 걸으면서 되새긴 것이 있다.
잘 걸었는가, 잘 걷고 있는가? 잘 걸을 수 있을까? 예년에 비추어 볼 때 목회 수립 주간은 신년 목회 구상으로 골머리를 앓으며 부심(浮心)하며 한 주간을 보내는 것이 통상이었을 텐데, 이번 목회계획 수립 기간은 내내 나는 올바로 걷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잘 걷고 있는가?, 잘 걸을 수 있을까를 주군께 묻고 또 물으며 보냈다. 목사의 영성은 교회의 영성이다. 목사의 영적 수준은 교회의 수준이다. 분명히 2024년 현실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역시 나는 지난 주간 기도하며 세운 목양의 내용을 다시 성실하게 감당하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하며 보낼 것이다, 그러나 한 주간, 교회를 떠나서 기도의 장소에 있으면서 제일 중요하게 성찰한 내용과 기도는 ‘나’와 ‘나의 삶’의 내용이었다. 12월을 맞이하면서, 2024년을 준비하면서 나를 뒤돌아본 결과, 계속해서 들었고, 하명(下命) 받은 영적 조명은 ‘엎드림’이었다. 목양의 내용이 기도이어야 하고, 목회의 질이 기도이어야 하고, 설교의 토대가 기도이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기도하는 목사는 영혼 사랑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고, 엎드리는 목사가 주군 앞에 부끄럽지 않은 영성으로 살아갈 것이며, 부르짖는 목사가 사역하는 교회는 건조하지 않을 것을 나는 믿는다. 2023년 11월 마지막 주간을 시작하면서 20세기 마지막 선지자라고 지칭되던 레오나드 레이븐힐이 『무릎 부흥』에서 외쳤던 사자후(獅子吼)를 나 또한 다시 한번 오롯이 새겨본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가? 라고 묻지만, 하나님은 어찌하여 너희는 깨어지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우리는 금보다 귀한 하나님의 약속을 태산같이 쌓아 놓고 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가? 라고 의아해하지만, 하나님은 어찌하여 너희는 순종하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굽어보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통곡하기를 원하신다.” 단 한 자도 누락(漏落)할 수 없는 목사에게 주는 시금석이다. 그렇게 살아보련다. 2024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