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예배를 마친 다음 날, 교회 지체가 새벽 예배를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다말에 대한 담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따른 메시지로 외연을 확장해서 해석하는 것이 옳은 접근인가요? 다말은 예수에 대해 1도 몰랐을 텐데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 얻은 쌍둥이 중에 베레스가 마태복음 1장 계보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는 해석인가요?” 11월 8일 창세기 124번째 강해를 수요일 설교로 준비하다가 참 난공불락과 같은 창세기 38장에 대한 두 번째 레마를 이렇게 전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낳은 둘째 아들 베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삽입되었다는 점은 다말은 전혀 몰랐었겠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의 플랜을 하나님이 책임지신 결과가 되었다.”고. 이렇게 다분히 통상적인 교훈을 전했다. 섬기는 교회 지체는 이렇게 전한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갸우뚱한 뒤에 질문한 것이 전술한 질문이었다. 지체의 질문 의도를 나는 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창세기 38장에 기록되어 있는 유다와 다말에 대한 담론을 J 문서로 분석했다.(국제성서주석-창세기, 401쪽) 구약성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창세기 문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고 동의하는 J 문서는 주전 950년경에 익명의 남 왕국 유다인에 의해 기록되었고 편집되었다는 인정한다. 이것을 인지한 지체는 그렇다면 유다와 다말 담론을 예수의 족보로 연계하여 해석하는 것은 너무 큰 비약이며 과유불급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담임목사의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질문했을 것을 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받은 지체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말이 시아버지에게서라도 씨를 받아 유다 계대에 자손 낳기를 간절히 사모한 것은 그녀가 구속사의 족보를 잇는 한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말은 훗날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톨레도트에 들어갈 것이라고는 당연히 1도 몰랐다. 다만 그녀가 시아버지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했던 것은 그녀 스스로가 고대 근동 문화에서 흔했던 결혼한 가문에서 자손을 낳지 못한 것은 곧 그 가문에서 축출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시대적 문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다말의 이런 간절하고 소박했던 소망의 결과물이 후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톨레도트로 연계된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플랜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 일이 된 셈이라고 수요 예배 시간에 해석한 것이었다고 에둘러 답변했다. 질문을 받고 답하면서 이런 소회가 밀려왔다. 다말과 유다 사이에 있었던 담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섣부르게 설교하는 것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섬기는 교회 지체가 목사에게 알려준 교훈이 되었다는 소회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인 교회 강단을 지키는 자는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한다. 곳곳에 날카롭게 설교를 듣고 있는 지체들이 귀를 세우고 있는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해서 긴장은 되지만 나름 감사하다. 설교를 듣고 있는 지체가 있다는 증거이기에.
창세기 38장, 여하튼 설교자에 곤혹스러운 텍스트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