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7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스물아홉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1:37-57 제목: 13년 만에
서론)
세계적인 선교기관인 WEC 대표를 맡아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지대한 영적 영향을 미쳤던 노만 그럽 선교사가 했던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믿음이란 바로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거는 행위입니다, 즉 인간 편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노만 그럽,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두란노, 64쪽)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체 내용을 부인하는 것 같아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실상 그럽의 말을 잘 주워 담으면 믿음이라는 정의가 이 보다 더 정확한 또 다른 표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적확합니다. 인간 편에서는 할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명제는 곱씹어 봐도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흔히 이럴 때 제기하는 것이 질문이 이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무가치한 것일까? 인간의 반응은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일까?”에 대한 제문제 제기입니다. 그럴 리가요. 인간의 행위나 반응은 믿음의 결과물입니다. 다시 한 번 새겨보는데 인간이 행하는 신앙적 일체 행위나 반응은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물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본론)
출애굽기 서사의 핵심 인물이자,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구원사에 쓰임받은 모세를 한 예로 들어보십시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엑소더스의 원인이 된 애굽 전지역에 내린 10가지 재앙 기사를 살펴보십시다. 나일강에 내린 피의 재앙으로부터 애굽 소산 모든 첫 것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0가지 재앙이 일어나는 동안 모세가 재앙을 일으키기 위해 행한 일이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없습니다. 정말 모세가 재앙을 일으키는 데 무언가를 행한 일이란 1도 없습니다. 모두가 야훼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단 10가지 재앙을 일으키신 야훼 하나님께서 매 재앙을 일으킬 때마다 어김없이 행하셨던 메시지를 출애굽기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화자는 야훼 하나님이셨고, 피-화자(皮-=話者)는 모세였습니다. 일하심의 능동적 주체는 야훼 하나님이셨고, 단지 듣고 순종하는 객체는 모세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모세는 듣기만 했고, 야훼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행한 순종도 적극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지 못해 했던 순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36-3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이어지는 사도행전 7:44절을 연이어 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모세는 맨 처음 당신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려던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출애굽을 성사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가신 분이십니다. 재강조하거니와 모세는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하나님 사역을 위해 행한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순종은 마지못한 순종이라고 해석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도 3,000년 후에 생존했던 믿음의 후배인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추켜 세웠습니다. 히브리서 11:23-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믿음의 주체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재 확인해 주는 명쾌한 성서적 근거가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왜 모세의 이야기를 끄집어냈는지를 말씀드립니다. 오늘 설교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일약 발탁됩니다. 그는 17세 되는 어느 날, 형들의 시기로 인해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위기의 땅인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팔림 자체도 기막힌 불행이었지만, 그 땅에서의 13년이라는 세월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 집의 집사로서 생활하던 11년의 기간도, 또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었던 2년의 시간도 요셉에게는 결코 쉽거나 행복한 시간이 아니라,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낸 13년은 우리들이 보는 시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요셉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기에 필요하다고 본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즉 지난 주 수요일 설교에서 말쓰드렸던 것처럼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이 기다리신 13년이라는 시간이었다는 말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또 재 강조하거니와 요셉이 13년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다리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간이 되자,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우셨고,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요셉 외에 그 어떤 이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 꿈의 해석을 통해 바로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고, 결국 요셉을 애굽의 총리에 등극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하셨습니다. 애굽의 총리에 등극한 요셉은 하나님이 일러준 그대로 7년동안 지속된 풍년으로 얻게 된 수확물들을 잘 보존하여 7년 풍년이 끝난 뒤에 이어진 7년 흉년 기간을 대비했고, 그로 인해 요셉은 명실공히 애굽의 제 2인자로 굳건히 서게 되었음을 본문이 제시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들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요셉 스토리의 줄거리입니다. 이런 세속적 승리에 대한 메시지를 교우들에게 전하기 위해 본문을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할 교훈은 전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이라는 낯선 땅, 그러나 당시 최고의 제국이었던 애굽에서 보냈던 13년이라는 세월을 해석한 요셉의 성찰을 통해 보는 영적 교훈입니다. 본문 51-5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은 애굽의 제 2인자로 선 뒤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내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얻었다고 창세기 저자가 보고합니다. 장자의 이름이 므낫세인데 애굽에서 당한 일체 고난을 하나님이 잊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잊다’라는 뜻을 가진 ‘므낫세’라고 지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둘째 아들도 얻게 되었는데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작명했는데 ‘번성하게 하다’라는 뜻임을 밝힙니다.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던 요셉에게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에게 믿음을 준 주체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13년동안 당했던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잊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분이 하나님임을 선포했습니다. 13년 동안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결국은 마지막에 손을 들게 하심으로 궁극적인 승리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결국 13년은 요셉 스스로가 연약했던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믿음으로 연단해 주신 하나님이 주신 복된 기간이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 기독교적인 믿음이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적인 믿음은 노만 그럽의 말대로 내 편에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전부를 이루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적어도 요셉에게는 그랬습니다. 이것을 확신했기에 요셉은 아들들의 이름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고 명명했던 것입니다. 이제 후에 우리들이 나누겠지만 요셉은 크로노스의 시분초를 하나님께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카이로스의 시분초라고 믿었기에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창세기 45:4-5절에서 이렇게 엄청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읽어 보십시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다. “내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바로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넘긴 그 요셉입니다. 저를 팔아넘겼다고 괴로워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그 일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이곳으로 보내셔서, 여러 목숨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적인 믿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 일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 일의 뒤편 즉 하나님 편에서 철저하게 일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 기독교적인 믿음입니다. 어제 화요일 아침에 묵상한 성서일과는 누가복음 1:46b-55, 사무엘상 1:19-28, 히브리서 8:1-13절이었습니다. 묵상하다가 택한 구절은 히브리서 8:2절이었습니다.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주일 낮 예배 강해를 통해 이미 살핀 텍스트가 히브리서이지만 어제는 8:2절이 새로운 각도로 내게 다가왔습니다. 해서 묵상의 글을 파일에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대제사장 중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를 섬기시는 분이다. 히늘 성소는 참 장막이다. 이 말은 이 땅에 세워진 한시적인 성소들은 불완전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늘 성소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다보면 교회 말고는 없다. 교회가 얼마나 불완전한 공동체인지 목회를 하는 목사들에게는 뼈저리게 체감된다. 그렇지만 교회는 한시적 하늘성소의 그림자라고 나는 믿는다. 왜? 주님의 핏값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에 그렇다. 이것을 전제할 때, 나는 이것에 조금의 요동함이 없다. 교회를 주님이 세우셨다. 그렇다면 교회는 실수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실수하고 허점 투성이지 교회는 실수하지 않는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는 교회는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완전한다. 불완전한 것은 사람이다.”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실수투성인 것은 나지,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믿음에서 흔들리거나 요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고 또 일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은 완전하시다는 것을. 어제와 오늘, 김희정 권사를 위해 세밀하게 기도했습니다. 김희정 권사를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교우들 중에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비웃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되는 기도를 하십시오. 김 권사가 앓고 있는 기저질환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입니다. 이제는 포기하세요. 몇 십년입니다. 바랄 걸 바래야죠.” 항암 치료를 하며 투병 중인 지체를 위해 혹여 어떤 이는 이렇게 무언으로 항의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목사님, 직접 암 환자들을 경험해 보셨잖아요. 기도를 안 한 것이 아니라, 했는데도 그들은 세상을 떠났잖아요. 암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병이에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정서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이들의 마음을 저는 압니다. 오죽하면 이렇게 말할까를 나름 동의하기에 그들이 말하는 항변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가 동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이성과 나의 의지와 나의 생각이라는 편에서 판단하고 정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 이성을 토대로 한 신념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적인 믿음은 신념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믿음이라는 것은 내 이성의 카테고리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김은혜 한의사가 작년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라는 제하의 임상 일기 형식의 글을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읽다가 울고 또 울고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부분 말기 암 환자들의 임종 보고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이런 절망적인 임상 보고를 하면서도 책의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독백한 글을 남겼습니다. “환자를 직접 떠나보내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세상에서 흩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미 떠난 이들에게는 존엄한 안녕을 바치고자, 남은 이들에게는 대신 써내려간 추억의 기록들을 남긴다. 나는 999명이 필요없다고 해도, 단 한 명의 환자가 살려달라는 걸 들어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 (김은혜,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글 ego, 프롤로그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단 한 명의 마음을 들어주는 의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작년에 작고한 고 이어령 박사와 대담한 기자의 글에 이 문장이 있습니다. “피와 땀을 붙여주는 게 눈물이야. 피와 땀이 하나로 어울려야 천 리를 달리는 한혈마(汗血馬)가 나오는 거라네. 나는 글을 쓰고 싶지만 글을 쓸 수 없을 때 글을 쓸 때가 있어. 그게 바로 눈물 한 방울이지.”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13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이란 영적인 한혈마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한혈마가 믿음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믿음의 주체이셨습니다. 13년이라는 시간은 하나님이 요셉을 쓰시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었습니다. 그대는 이 시간의 명제를 믿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오늘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다시 창세기 41:51-52절을 읽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믿음이란 내 인생에도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임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견지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 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 꾸게 하네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렴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 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