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아버지2024-03-13 18:15
작성자 Level 10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스물 두번 째 강해)

 

본문: 창세기 37:29-36
제목: 아버지


서론)

이미 우리들에게 너무 잘 알려진 손택수 시인의 시집 『호랑이 발자국』 안에 담겨져 있는 ‘아버지의 등을 밀며’라는 시를 읊조리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2007, 창비.)
 
아버지라는 타이틀로 인생을 산지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보니 아주 선명하게 느끼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식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아버지 혹은 어머니 즉 부모가 걸었던 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단언해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모르고 살다가 조금이나마 어렴풋하게 부모가 걸었던 삶을 그림자라도 느낄 수 있었던 시기는 나 또한 부모가 되고 난 후였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경험하고 난 뒤에 아버지의 정서로 자식을 이해하는 폭과 같은 맥락으로 볼 때 자식들이 부모를 이해하는 이해폭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답은 아마도 그게 인생의 법칙이라고 말하면 어느 정도의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


본론)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성경 내증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아 무엇이라고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요셉이 다른 동생들에 의해 이스마엘 상인 즉 미디안 출신의 카라반들에게 은 이십에 팔릴 때 그 장소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단에 돌아와 보니 구덩이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요셉이 사라진 것을 보고 맏형의 모습으로 애통해 합니다.

본문 29-31절입니다.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르우벤이 나는 어디로 갈까? 라고 번역한 문장의 의미는 직설하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혹은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을까?”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 본다면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범한 반 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자였지만,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성품의 소유자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그의 성품이 요셉을 팔아버린 동생들과의 공동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후속 행동 때문입니다.

31-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대단히 가증스러운 행태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공범의 죄를 도모합니다.
요셉이 입고 있었던 채색옷을 벗겼던 형들은 요셉을 팔아넘긴 후에 숫염소를 죽여 요셉의 옷에 묻히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요셉의 옷을 보임으로 요셉이 들짐승에게 해를 당한 것으로 위장해 버리는 집단적인 범죄에 동의합니다.
여기에는 요셉을 잃어버렸다고 옷을 찢으며 가책했던 르우벤도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도진개진이었습니다.
무섭도록 서늘한 것은 비록 어머니는 달라도 아버지의 피를 같이 이어받은 씨족공동체에 속한 형들의 무감각입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히 알고 있는 에수님의 어록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행한 죄를 알지 못함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섬뜩해지게 만드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무섭고 무서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들은 자기들이 지은 죄를 알고 있지만 그 죄를 자행하고 숨겼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저지른 만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천하가 공로할 형제간의 죄와는 정반대되는 급부의 메시지가 이어지는 33-35절까지의 내용에 기록되어 있는데 살피겠습니다.

창세기 37:33-35절을 읽습니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아버지 야곱의 행동을 창세기 기자가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요셉의 피묻은 옷을 받아본 야곱의 반응을 총정리하면 이렇게 대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요셉 대신 죽는 게 차라리 좋겠다.”입니다.
세상에 어떤 존재가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내가 차라리 스올(지옥)로 내려가는 게 낫겠다고 토로하겠습니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말고는 없습니다.
내가 죽음을 선택하고 자식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차라리 그 길을 기꺼이 선택하겠다고 자청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부모 외에는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의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마아가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 비해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도덕적으로도 아주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누이인 다말을 욕보인 이복형 암논을 살해했고, 이것도 모자라 결국에는 아버지 다윗을 왕위에서 쫒아 내고 자기 스스로 자칭 왕위에 오른 배은망덕의 자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잔존세력들이 나중에 세를 규합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 다윗을 쫓아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이려고 했던 패륜적인 자식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는 아들의 위험을 피해서 예루살렘을 도망하여 광야 길로 떠나면서 맨 발로 산을 오르는 수모를 당하는 기사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5:3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아들에게 쫓겨나 감람산으로 올라갈 때 맨발로 도망가야 하는 다윗이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론으로 표현될 수 없는 참담한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악의 길을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다고 약속한 시편 1편의 메시지처럼 하나님은 다윗에게 다시 역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18장에 이르러 다윗의 진영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압살롬에게 일격을 가하는 반격에 나섭니다.
결과 요압을 중심으로 한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를 격파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압살롬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가다가 상수리나무에 걸리는 신세가 됩니다.
상황이 역전되었을 때 다윗은 전쟁의 선두에서 지휘하던 요압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하고 당부했지만, 요압이 순종할 리 만무입니다.
남겨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한 요압은 상수리나무에 달린 압살롬을 일거에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이고 대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승리의 소식을 구스사람이 가지고 다윗에게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 승전보를 다윗 왕에게 기쁨으로 보고합니다.
하지만 다윗의 관심은 한 가지, 압살롬이었습니다.
다윗은 승전보를 가지고 온 구스사람에게 압살롬의 안부를 지체 없이 질문을 합니다.

사무엘하 18:32절 전반절입니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아들 압살롬의 안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구스 사람이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32절 후반절입니다.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요압이 압살롬을 살해했다고 보고하자 다윗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들의 죽음에 대해 통곡을 합니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18:33절입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자기를 죽이려 했고 집안의 위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심지어는 형을 죽이고 자신의 후궁들과 동침했던, 자식은 둘째 치고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패륜 자식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울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울었다고 번역한 히브리어 ‘바카’는 ‘대성통곡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한 패륜아의 죽음 소식을 보고 받고 엄청난 슬픔에 빠져서 대성통곡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십시다.
아들들의 가증한 보고에 속아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생각한 아버지 야곱은 이렇게 ‘바카’하였습니다.
다시 본문 35절입니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무덤으로 가련다. 아버지는 요셉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메시지 번역 창세기 37:35절 후반절)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아버지 야곱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상 본문 해제를 통하여 오늘 우리들이 받아야 교훈을 가슴에 새겨보기를 원합니다.

※ 아버지 사랑의 영적 교훈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셨던 대속의 은혜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동통의 여백을 갖고 있습니다.
“스올로 내가 내려가겠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았을 뻔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하지만 눈여겨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너무 아파했지만 야곱도 요셉을 위해 대신 죽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압살롬을 위해 대신 죽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패륜적인 상태에 있는 아들들을 위해 대신 죽음을 맛보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일찍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도 스스로 요한복음 15:13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렇다면 진짜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감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께서 죄인이었던 나와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면 이 사랑은 단지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큰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대신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죽으신 사랑입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위해 죽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냥 설명 불가한 사랑의 극치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묻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곧잘 부르는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나를 안으시고 바라보시는/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나를 도우시고 힘 주시는 아버지
주는 내 마음을 고치시고/볼 수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내 영혼을 새롭게 세우시네


가사에 담겨 있는 신앙고백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이심을 믿고 계십니까?
안으시고, 바라보시고, 도우시고, 힘주시며, 고치시고, 상처를 만져주시며, 이해하시고,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한 가지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본문 마지막 36절을 읽겠습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우리는 이 구절이 생뚱맞게 이 부분에서 등장한 것을 의아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목회자나 신학자에게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구절에서부터 요셉을 통한 이스라엘 구속사의 서막이 열리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 팔려간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힌 감옥, 그러나 그 감옥에서 우연히 있었던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풀어준 것이 기회가 되어 바로의 궁전 이르게 되어 바로의 꿈을 풀어줌으로 일약 애굽의 총리로 발탁되는 일까지 요셉의 대서사의 서곡이 오늘 본문 36절이기에 창세기 기자는 바로 이곳에 이 구절을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36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해 주신 대속의 행동을 그림자로 보여주는 구속사의 결정판입니다.
기막힌 배치가 돋보이지 않습니까?
요셉을 잃어버린 아버지 야곱의 통곡에서 보는 그림자가 무엇입니까?
아들 예수를 우리 죄인들을 위해 보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슬픔을 보게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있는 보디발의 집에 팔린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를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심으로 전개되는 구속사의 서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완성되는 극적인 감동을 오늘 본문을 통해 보게 된다는 감동이 있습니다.
기억하시고 명심하십시다.
요셉이 팔렸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사가 열린 것처럼, 예수께서 팔리심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열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꼭 감당해야하는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야곱이 요셉이라는 아들을 사랑한 것과를 비교할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을 사랑한 그 사랑의 메시지 안에 나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하신 아들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최남규 안수집사님의 장례를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이번 장례에서 우리 교우들은 최종국집사 때문에 많이 울었습니다.
아들이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 사랑이 마음으로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이것을 믿습니다.
최남규 안수집사께서 장남인 최종국 집사를 사랑한 사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번 장례식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재삼 확인할 수 있어서 집례 목사로 나름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프레데릭 레만은 농촌에서 평생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활비를 받을 수 없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여러가지 잡일을 해야 했습니다.
레만 목사는 치즈 공장에서 부업을 해야 했기에 항상 점심은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끼니를 떼워야 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싸준 도시락에 글귀를 하나 첨부되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보, 바다가 먹물이고, 하늘이 두루마리인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랑을 다 담을 수 없을 거에요.”
아내가 써 준 용기를 내라는 글귀를 받는 순간, 영감이 떠올라 도시락을 먹는 동안 위대한 곡 하나를 작사, 작곡하는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
그 곡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창하는 찬양 2위에 오른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늘은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찬송가 304장을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