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나그네입니다.2024-03-07 17:29
작성자 Level 10

2024년 2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베드로전서 1:1-2

제목나그네입니다.

 

서론)

 

미국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뛰어난 소설가요예술 평론가라는 명성을 받았던 수전 손택의 어록 중 하나를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소개했습니다.

다시 곱씹어 보겠습니다.

난 내가 아닌 것들을 통렬히 의식하고 깊이 매료된 삶을 살아요그러면 그 아닌 것에 흥미를 느끼고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요.” (수전 손택수전 손택의 말마음 산책, 165)

적어도 대단히 상식적이고지성적인 존재들은 나에 대한 비평적 성찰에 소홀하지 않는 공통의 선을 그리며 살아갑니다.

그래야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그릇된 길인지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길이라면 고집스럽게 그 길을 걸을 것이며그릇된 길이라면 그 길에서 빠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인식은 대단히 중요한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하지만세속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훨등히 자기 인식에 있어서 철저해야 하며냉철해야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에 접근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너그러워서는 안 됩니다.

대단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베드로전서의 서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란 과연 어떤 존재이며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대단히 적절한 텍스트입니다.

 

본론)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갈라디아갑바도기아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구절을 들여다 보면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신자는 누구입니까?

정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사도 베드로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베드로전서 5: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자신의 정체를 쉼프레스뷔테로스’ 즉 함께 장로된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저자의 지칭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밝히면서 저자의 정체성을 아포스톨로스’ 즉 사도라고 밝혔지만, 5:1절에서는 자신의 신분은 함께 장로된 자라고 밝힘으로 직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주석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5:12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그렇다면 그림이 그려집니다.

베드로전서라는 일반서신은 베드로가 저자이든아니면 베드로의 전승을 따르던 어떤 장로가 저자이든 직접 서신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도드라집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를 직접 쓴 사람은 실루아노(실라)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필자가 실루아노(실라)라는 동역자였다는 말입니다.

대필자가 실루아노(실라)라는 것을 밝힌 이상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의 집필 연대입니다.

실루아노(실라)는 우리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신뢰하고 사랑했던 형제요 동역자였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최고의 사역은 사도행전 15장에 기술되어 있는 제 1차 예루살렘 종교회의였습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는 주후 49년의 일입니다.

바울이 실라와 가장 역동적으로 일했던 시기를 주후 49년이라고 정의할 때베드로전서라는 서신의 기록 연대는 가장 최저점으로 보는 시기는 주후 50년 이후가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성서 정경 외에 주후 1세기 중후반 저작으로 여겨지는 외경 및 기타 자료에 의하면 베드로의 순교 시기를 네로에 의해 자행되었던 로마의 대 화제 사건의 안팎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감안할 때 주후 64년도 포함합니다.

하지만 64년 즈음에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수 없다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를 가했다는 정황은 로마에 국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감안할 때 이제 언급하겠지만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은 로마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지금으로 말하면 튀르키에의 영역 안에 있는 로마의 속주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이 편지의 수신자들입니다.

튀르키에에 살고 있었던 크리스천들에게 로마 황제가 박해를 가했던 시기는 도미티안 황제 시기인 주후 1세기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전서의 저적 연대는 주후 64년 이후부터 1세기 후반의 저작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즉 1세기 말에 어떤 그리스도인 저자가 자신이 존경하는 베드로의 전승들을 토대로 하여 베드로의 이름으로 기록한 서신서이다.” (박수암공동서신-베드로전서대한기독교서회, 104)

이제 우리는 본문으로 택한 1:1-2절 해석을 위한 선제적 사항들에 접근했으니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고 싶은 중요한 테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나누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갈라디아갑바도기아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저자는 명징하게 수신자를 밝힙니다.

지금의 튀르키에에 위치한 소위 말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2절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전서 기자는 수신자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세부적으로 밝힙니다.

⓵ 하나님이 예지하심으로 선택받은 자들

⓶ 성령이 거룩하게 한 자들

⓷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택함을 받은 자들

결국 이 세 가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수신자들의 정체성이 정의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기자로 인해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베드로전서 수신자들의 또 다른 정체성이 소개됩니다.

흩어진 나그네’ (파라피데모이스 디아스포라스)입니다.

흩어진이라고 번역된 디아스포라스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해서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유리하는 유대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은 그렇게 전 지역으로 흩어진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복음을 접하게 하였고 결국 그들을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는 증언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던 특별한 계획에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주의 계통에 있는 학자들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을 정의할 때 그들의 근원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언급하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던 120여명의 성도들 가운데는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다국적 이방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근거가 있습니까?

사도행전 2:5-6절입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그렇습니다.

이들이 바로 흩어져 있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는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고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던 지역으로 돌아가 말할 것도 없이 경건한 크리스천으로서 변화된 삶을 살면서 지역 복음화의 첨병들이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성경적 내증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전서 기자가 언급한 정말로 중요한 단어는 나그네입니다.

즉 파레피데모스입니다.

파레피데모스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영적인 시각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1) 이 땅이 영원한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잠시 머무는 자들입니다.

 

2:11절을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서신서의 저자는 역설합니다.

그들은 나그네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머물 자가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머물 자가 아니기에 나그네들이 지켜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점은 주목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영원히 머물지 않을 장소에다가 내 삶을 만족하게 하고안락하게 할 것들을 만들거나 고정시키지 않는 것은 대단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조금 후에 떠날 장소에 주초가 든든한 집을 만들지 않습니다.

지난 주간에 탁구장 동아리 회원 중에 한 자매가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궁금한 게 있는데요목사님들은 한 곳에서 계속 계시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모든 교회가 그런가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천주교회는 중앙에서 인사 이동을 하지만개신교회는 개교회 중심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다만 구세군이나성공회 같은 특별한 교단은 개신교회도 중앙에서 인사이동을 지시합니다거의 대부분 약 5년 정도마다 임지를 변동시킵니다이런 과정을 통해 특이한 현상이 하나 발견됩니다구세군과 성공회가 한국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5년이라는 임기 기간이 지나면 간다는 생각에 부임한 목회자들이 최선을 다해 지금 자기가 있는 교회를 섬기지 않은 불합리성입니다한 곳에 머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신을 뿌리내리지 않는 것이지요이것이 성장을 가로막는 한계입니다.”

대단히 보편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잠시 거처하는 곳에 생명을 투자할 만큼 치열하게 뭔가를 만들어놓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한 실례를 들었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도 이것은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내가 거처할 영원한 장소에 반하는 것이라면 영원하지 않을 것들을 이 땅에서 추구하는 것만큼 어리석기 그지 없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기자는 영원하지 않을 것들을 단호한 단어로 정의합니다.

육체의 정욕들입니다.

누가복음 12:13절 이하를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대단히 안타까운 구절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부자가 어느 해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 소출이 많은 풍년을 경험했다고 기록합니다.

거둬들인 곡식이 너무 많아 저장할 수 있는 곳간이 부족한 것을 알고 종들에게 더 큰 곳간을 만들어 소출을 저장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 뒤에 곳간 공사를 마치고만족한 듯이 잔치를 베풀어 풍년을 축하하는 파티를 벌입니다.

바로 이때 부자가 피력한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2:19절입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기에 번역된 영혼’ 즉 푸쉬케는 통상 헬라문화권에서 육체를 의미하는 싸륵스와는 반대의 개념입니다.

적용한다면 어리석은 부자의 치명적 오류는 육체의 만족을 영혼의 만족으로 착각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와 영혼을 같은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의 지론에 의하면 육체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갈라디아서 5:19-21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육체의 정욕과 맞서는 자들입니다.

이 땅을 자기들이 영원히 거할 본향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나그네는 반드시 떠나게 될 것을 인식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신명기 1:6-7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시내산에서 약 1년간 머문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이끌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명령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시내산에서 머물지 말고 그 땅을 떠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주석한 송병현 교수의 해제를 한 번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을 떠나야 한다는 것은 그곳이 영구적으로 거할 처소가 아니었다는 뜻이다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의 백성이 되었지만영토를 소유한 국가로 출범하기 위해서는 그곳을 떠나야 했다이스라엘이 소유하게 될 땅은 왕이신 하나님이 백성인 그들에게 내리신 하사품이다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신명기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된 핵심적 사실이다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처지를 마련해 두시고 그들을 초청했던 것이다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은 우리가 영구적인 안식처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떠나라고 초청하신다영구적인 안식처에 입성할 때까지 우리의 삶은 계속 이동하는 것이다.” (송병현엑스포지멘터리 주석-신명기, 87)

구약학자가 학문적인 주석서에 기록한 내용들이 은혜로 다가오는 경우가 흔지 않은데 송 교수의 해제는 마음을 울컥하게 하는 감동으로 와닿았습니다.

정말로 어리석은 자는 이 땅에 철옹성을 구축하는 자들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견고하고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는 자기들의 제 2바벨탑을 구축하는 자들이야 말로 정말로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인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설 명절 아침에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시간에 보았던 성경은 시편 90:14-17절이었습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설교 시간에 이렇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편 90편에 나타난 이 구절에서 모세의 전승이 구구절절 의미하는 감동이 있다모세는 120년을 살면서 기쁜 일슬픈 일산전수전공중전의 삶의 질곡을 보냈는데 어떤 상황이 와도 그 상황들을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반전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그러므로 우리도 2024년에 닥치는 모든 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바라보는 반전의 기회로 삼자."

왜 이렇게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불행이든어떤 위기든어떤 기쁨이든어떤 행복이든 우리는 이 땅에서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적과 천로역정의 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반드시 떠날 날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이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파레피데모스’ 즉 나그네들은 막 살지 않습니다.

랜덤으로 살지 않습니다.

가야할 본향에 합당한 자세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학교 선배 목사님이신 박광철 목사께서 쓰신 책에서 이 글을 읽었습니다.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그네들은 세상 사람들과 4가지가 달라야 합니다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에 국적이 다릅니다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이고 구별된 백성이기에 언어도 다릅니다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정직이 바로 그 바로미터입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외모도 달라야 합니다세상의 추한 옷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박광철광야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생명의 말씀사, 145)

나름 새겨야 교훈이지 않겠습니까?

 

결론)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명절이 될 때마다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고향 생각이 간절해 집니다.

헌데 아버님어머님이 소천하신 이후 고향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많이 희석된 게 사실입니다.

누님과 형님들 가족이 고향에 있지만부모님 살아생전에 비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많이 퇴색된 게 사실입니다.

가민히 생각해 보면 이런 소회는 인지상정인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소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생각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왜요?

그곳에는 부모님들의 냄새가 있고제 추억의 기억들이 여전히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물며 내 영혼의 영원한 고향인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가는 파레피데모스’ 즉 나그네들입니다.

요한복음 14:2-3절을 읽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바라기는 예수께서 먼저 가셔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본향의 그 처소를 사모하는 나그네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그 거룩한곳 아버지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간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가서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찌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