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왜 듣습니까? 본문: 사도행전 24:24-26 서론) 지금 카타르 도하에서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이 우여곡절 끝에 4강에 선착하여 이제 우승까지 두 경기만을 남겨둔 상태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단의 치열한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합니다. 호주와 8강 경기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16강 토너먼트와 같이 후반전 인저리 타임에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뒤, 연장 승부 끝에 2;1로 승리해 준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이 경기가 끝난 뒤, 여론은 승리의 주역인 손흥민 선수를 집중적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그가 인터뷰에서 나눈 마지막 엔딩 멘트에 수많은 팬들이 열광했습니다. “경기에 임한 선수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경기를 뛴 선수들보다 뛰지 못한 선수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손흥민 선수가 남긴 인터뷰의 내용을 영상을 통해 접하고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에 있는 축구인들이 손흥민에게 열광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인터뷰를 통해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선동질에 넘어갑니다. 그것이 비상식적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변이라도 열광하며 그것에 마비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이라면 적어도 예의가 있는 상식에 열광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라는 직을 갖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저를 향해 천편일률적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맹목의 관점에서 주님을 따른다고 이미 선입견을 갖고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고정된 관념으로 저를 평가하는 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이 제게는 있습니다. 제가 제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는 그 분이 자격없는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의 감격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조금도 이 점에 있어서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주군을 따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을 갖고 예의 있는 삶을 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고난주간 목요일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는 소위 말하는 세족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주님이 12제자들 모두에게 공히 마지막으로 교훈하신 공식적인 교육의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이미 마귀가 들어간 가롯 유다도 있었던 자리였기에 이 땅에서 거할 주님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주님은 만찬을 마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오신 주님은 입고 계셨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이윽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주님은 다시 벗으셨던 겉옷을 입으시고 제자들의 고별 설교를 하십니다. 고별 설교의 내용은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들도 나를 본받아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자가 되라는 종의 도였습니다. 세족 목요일에 행하셨던 주님의 행동을 다시 곱씹어 보십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전에 주님은 당신이 입고 있었던 겉옷을 벗었다고 했습니다. 이후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주님은 다시 벗었던 옷을 챙겨 입었다고 요한복음 13:12절은 알려줍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께서 세족 목요일, 마가의 다락방에서 입고 있었던 옷, 세족식을 거행할 때 벗으셨던 옷, 그리고 세족식을 마치고 다시 입으셨던 옷은 공히 헬라어 ‘히마티온’의 번역입니다. ‘히마티온’은 통상 모든 옷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세족식에 등장한 예수께서 입고 계셨던 옷은 외투의 성격이 진한 단어입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외투라면 외출할 때 입는 옷입니다. 격식을 갖춘 옷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노숙자처럼 사셨던 주님이셨기에 주님이 입고 계셨던 ‘히마티온’은 그리 자랑할만한 좋은 옷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다만 팔레스타인의 추위나 비를 막아주는 정도의 옷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게도 ‘히마티온’은 옷다운 옷, 그러니까 타인들 앞에 설 때 남부끄럼을 당하지 않는 격식을 갖출 때 입는 옷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기 전에 그 옷을 벗으셨습니다. 종의 모습을 보이셨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격이 있는 옷을 벗는 것부터 시작하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는 시청각적인 교육인 세족식을 마치신 주님은 다시 ‘히마티온’을 입으셨다는 점입니다. 이제 주님은 선생의 자리로 돌아오셨습니다. 무언가를 권하고 교훈해야 할 위치로 돌아오신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옷을 다시 여미신 것입니다. 주님이 예의를 갖추시고 당신의 사역을 감당한 분이시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요소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면서도 상식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삶을 산다면 그것처럼 이율배반적인 삶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론)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후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 간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도리가 없어 당시 예루살렘을 관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던 총독 벨릭스에게 고발했고, 이로 인해 로마의 황제 앞에 설 때까지 미결수 신분이었던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의 사설 감옥에 구금되어 로마로 압송되기까지 일련의 심문들을 당하며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울 죽이기에 올인한 예루살렘 산헤드린 중심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죄를 확정 짓기 위해 로마 출신의 변호사인 더둘로까지 돈으로 매수하여 집요하게 벨릭스에게 고발했고 이로 인해 정치적, 종교적인 교리 공방이 벌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런 사악한 핍박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벨릭스에게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경험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증언합니다. 쌍방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자 벨릭스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립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사도행전 24:22-23절입니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유대인들이 바라던 대로가 아니라 도리어 혹 떼려다 혹붙인 꼴이 된 판결을 내린 셈이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벨릭스는 대단히 바울에게 긍정적인 호의를 보인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러운 벨릭스의 행보를 오늘 본문이 소개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의미 있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문 24-25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선고를 유예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 벨릭스가 이번에는 자신의 아내인 드루실라와 함께 있는 자리에 바울을 다시 불러내었음을 보고 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이기도 한 드루실라는 미모가 출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야망이 있었던 아버지의 정략적인 정책으로 인해 동부의 소아시아에 위치한 콤마게네의 왕자와 약혼하였으나 왕자가 할례를 거부하므로 파혼이 되고, 15세에 수리아의 작은 국가인 에메사의 왕인 아지즈에게 출가하였으나, 그녀가 18세 때에 미색에 반한 벨릭스가 그녀를 빼앗아 세 번째 아내로 삼았다고 역사가들의 자료가 증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결혼을 할 정도로 문란했던 여인은 이제는 당시의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남편의 힘을 이용하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야망의 여인이었습니다. 이러한 당대의 정황을 전제할 때 본문 24절에서 벨릭스가 자기의 아내와 더불어 바울이 전하는 도를 들으려고 했던 것은 의외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벨릭스에게 바울이 가이사랴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그 와중에 행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25절 전반절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분명히 자유를 주었지만 그래도 죄인의 신분이었던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 앞에서 바울이 외친 내용이 세 가지입니다. ① 의였습니다. ② 절제였습니다. ③ 장차 올 심판이었습니다. 첫째로 언급한 바울이 말한 ‘의’라는 단어가 무엇을 말합니까? 가장 단순한 답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언급한 ‘절제’는 헬라어 ‘엥크라테이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자기를 통제한다’(SELF-CONTROL)의 의미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소개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5:22절 이하에서 절제의 순서는 맨 마지막입니다. 의도가 보입니다. ‘절제’ 즉 ‘자기를 통제하는 능력’은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의 결정판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 전하고 있는 이 덕목은 아마도 이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절제’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항목에 완전한 반하는 삶을 살고 있는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루실라는 권력에 탐을 내어 남편을 버리고 세 번째로 결혼을 한 비윤리적인 행태의 주인공이었고, 또 한 사람은 육체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마찬가지로 남의 아내를 뺏어버린 비상식적인 사람이었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바울의 세 번째의 메시지는 이 두 사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장차 올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심판’이라고 번역된 ‘크리마’는 ‘둘로 조각을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날에 선악간의 구별을 반드시 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을 통해 듣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는 적어도 막 사는 삶의 대명사였던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는 치명적 독설로 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시사점을 발견합니다. 벨릭스에게 바울이 전해 준 그리스도 예수의 도, 다시 말해 벨릭스도 스스로 듣고 싶어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바울은 기막힌 통찰로 가장 핵심적인 세 가지 단어로 요약해서 전해주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며 주관적 해석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바울의 선언은 대단히 정확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도를 듣고 있는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인생 일대의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입니다. 자신들이 걸었던 덕지덕지한 죄악을 청산하고 바울이 전해 준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로 돌아서서 이제부터는 도에 합당한 삶을 살아낸다면 그들이 들은 말씀은 최고의 가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 26절의 기록을 만나면 그런 기대감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마감을 하는 절정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 마지막 구절을 접하다보니 참담하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벨릭스는 바울로부터 인생 최고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들었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1:1 교습으로 들었습니다. 듣는 그 순간,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세 가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복음의 엑기스에 단 하나도 부합되지 않는 죄 많은 인생을 살고 있었던 자였기에 순간 두려워했지만 그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바울을 다시 소환합니다. 벨릭스가 바울은 소환한 이유는 자신을 두렵게 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받을까 하는 바램 때문이었다고 누가는 고발합니다. 사도행전 24:16-17절을 잠시 나누겠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이유는 마케도냐 지역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돕기 위해 헌금한 구제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올라온 것임을 벨릭스에게 밝힌 내용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적지 않은 물질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벨릭스는 그 물질을 갖고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는 않을까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이유로 인해 바울을 더 자주 불렀다고 누가는 적시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오늘 설교를 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를 교우들에게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받은 뒤에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 세인 지체들은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나서 여러분은 어떤 설교 이후의 후속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적어도 수년 혹은 수십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듣고 오신 교우들이 여기 거의 대부분입니다. 묻겠습니다. 오늘 예배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 꼭 일주일 전에 ‘내 식 내려놓기’라는 제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꼭 3일 전에 ‘고난은 사람을 변화시킨다’라는 제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치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전했던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벨릭스처럼 우리도 여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기적으로 듣습니다. 벨릭스처럼 놀라셨습니까? 아마도 그러셨을 겁니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대단히 기본적인 소양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또 질문하겠습니다. 그렇게 놀란 뒤, 여러분의 그 다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의 종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기 위해 예배에 더 많이 참석하셨고, 설교를 들으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묻겠습니다. 그 다음은 어떠셨습니까? 말씀따라 움직였습니까? 말씀보다 앞서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벨릭스의 행보처럼 말씀은 받았는데 그 말씀이 도대체 나와 무슨 관련이 있냐고 되물으몊 받은 말씀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악순환의 궤도에 머물러 계셨습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여 너무나도 슬프게 벨릭스처럼 말씀이 아닌,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서 무슨 유익을 얻을 것이 없는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분은 이 자리에 없습니까?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안에 담겨 있는 또 다른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17:10-13절을 보겠습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바울이 빌립보에서 사역을 승리하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들어가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변화되었다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그 지역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앙심을 품고 바울 일행을 핍박하자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피해 인근 베뢰아 지역으로 옮겨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베뢰아에서 복음을 받은 자들이 반응한 구체적 보고를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다시 17:11절을 읽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 구절을 이전에 보던 개역판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신사적이었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유게네스’는 문자적인 의미가 ‘마음을 열다’ 즉 ‘open mind’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연다는 것을 ‘신사적이었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의미가 너무 궁금하고 궁금해서 그 말씀을 더 간절히 사모하며 상고하는 예의가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이제 오늘 설교의 레마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예의 있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무시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벨릭스와 같은 무례한 자들이 아니라 베뢰아에서 말씀으로 변화된 성도들처럼 말씀을 존중하는 자들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장에 트러블이 생겨 적지 않은 고생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비타민 C와 D를 가능하면 끊지 않고 복용해 왔습니다. 지난 주에 복용하던 C,D를 다 먹어서 아내에게 여분이 몇 개나 남았는지를 물었더니 제게 서재에 있는 센트룸 실버를 복용하라고 일침했습니다. 서재에 있는 센트룸 실버가 상당수 많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유효기간이 상당히 지난 거라 조금은 찝찝했지만 아내의 말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침에 복용을 했습니다. 이후, 그날 하루 종일 고생했습니다. 센트룸 실버에 적혀 있는 복용 매뉴얼 중에 Warning text를 뒤늦게 보았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Do not consume products that have passed their expiration date. The expiration date is 1 years.” (유통기한이 경과된 제품은 소비하지 마십시오. 복용기간은 1년입니다.) 3년이 지난 것을 무시하고 먹은 그날 저는 많이 힘이 드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일종의 약 복용 매뉴얼을 무시해도 탈이 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무시하는 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1월 31일 수요기도회 설교를 영상으로 본 지방에 거주하는 지체가 이렇게 피드백을 보내주셨습니다. “창세기 44장을 통하여 들려주신 말씀 잘 받았습니다.저도 고난의 뒤안길에 있는 축복을 바라볼 수 있는 영안으로 살게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 어떤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믿음과 영력을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하셔요.” 저는 이 지체의 옆에서 5년 간 그를 섬기면서 그가 얼마나 말씀 앞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지를 옆에서 목도했던 분명한 추억이 있기에 이 지체의 진정성을 믿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말씀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자가 어찌 실패할 수 있으며, 넘어질 수 있겠습니까?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남긴 가장 상식적인 멘트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목사인 제게 참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는 정말로 예의를 갖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은 자만이 영웅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 않은 동역자들도 마땅히 아름다운 자들이며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존중해주는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런 거룩한 욕심과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왜 받습니까? 그리고 왜 받아야 합니까? 그 말씀은 가장 존중받아야 할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나서 그 받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말씀을 존중하는 자의 태도이며 예의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받은 말씀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받은 위에 내팽개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마십시다. 나는 우리 세인 공동체 안에서 제 2, 3의 벨릭스가 사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