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0일 월요일 성서 일과 묵상 그만 자자.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47:12-20, 역대하 1:7-13, 마가복음 13:32-37 꽃물 (말씀 새기기)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최초 복음서라고 지칭하는 마가복음 저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느껴진다. ‘깨어 있으라’ 주후 70년을 기점으로 작성된 것으로 간주 되는 복음서 저자의 일성이 예사롭지 않다. 깨어 있으라는 말의 속뜻은 그래야 하는데 잠자고 있는 상태를 염려한 권면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티투스가 몰고온 로마의 대군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난, 혹은 날 재앙이 임박했고, 아니면 경험했는데도 잠자고 있는 나태함과 안이함이 뒤덮고 있는 공동체를 직시한 저자는 줄곧 ‘깨어 있으라’고 촉구한다. 왜 이 소리가 절절할까? 아마도 이 경성하라는 외침이 주후 70년대가 아니라, 2024년 오늘이 더 절박하기에 그렇다. 동서남북을 보아도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는 오늘이다. 랜덤을 넘어 만신창이가 된 오늘이다. 그런데도 영적으로 졸고 있는 작금이니, 어찌 ‘깨어 있으라’는 소리에 둔감할 수 있으랴! 12월 30일 아침이다. 오늘 아침 새벽 큐티 시간에 읽었던 요한계시록 22:1〜5절이 다시 떠오른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완벽한 에덴의 회복이 다가온다. 나는 그날을 향하여 걷고 있다. 그날의 주인공은 깨어 있는 자들이다. 오늘도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다. 두레박(질문) 깨어 있나?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이 깨어나게 하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옥에 있던 베드로의 옆구리를 찼던 천사의 삶을 나도 살게 하옵소서.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비행기 참사를 당한 이들의 유족들과 비명횡사한 이들이 남겨두고 떠난 이들을 안아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