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데이빗 M. 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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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감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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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5-16 09:4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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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M. 카의 “거룩한 회복탄력성-트라우마로 읽는 성경”을 읽고, 차준희역, 감은사, 2022년 7년 전 즈음이다. 모 기도원에서 일주일간 사무총회 준비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차를 폐차할 정도로 큰 사고를 당했다. 1차선에서 2차선으로 갑자기 급하게 끼어들던 차량을 피하려다가 꺾은 핸들이 이후 말을 듣지 않아 고속도로 양쪽에 있는 가드레일을 수 차례 들이박고서야 승용차가 멈췄다. 에어백은 조수석까지 터지고 앞 범퍼는 엔진이 터져 폭발 직전이었는데 다행히 차가 전복되지 않고 운전석 문이 열리는 행운(?) 때문에 차에서 빠져나와 생존했다. 끔찍한 회상이지만 고속도로 上이었기에 뒤에 이어지는 차량들이 있었으면 오늘 글을 쓰는 저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그날 이후 6개월 동안 핸들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또 거의 1년 어간 아내가 함께 동승하지 않으면 운전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도 사고가 난 그 자리를 또 지나치려면 식은땀이 나는 후유증에 시달리곤 한다. 소위 말하는 PTSD(Post-traumatic-stress-disorder)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최고의 문학 이론가 캐시 케이루스가 정의한 트라우마를 소개한다. “트라우마는 예측 불가능성 또는 공포로 인해 사전 지식의 도식 안에 위치할 수 없는 사건과의 대립이다.”(p,21) 이 인용문을 소개한 저자는 트라우마를 본인의 언어로 이렇게 재해석했는데 적절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다.”(같은 페이지) 이 공포를 전제한 카는 성경에 등장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인 트라우마를 경험한 자중에 생존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이 폭력적인 선물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 일부가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은 더 깊은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발전시키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성장한다.”(pp,18-19)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멤버십 전체가 이런 회복탄력성을 경험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럴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저자의 갈파는 진부하지 않고 신선했다. 역사 안에서 이 점이 분명해 보이도록 저자는 글을 써 내려간다. 저자가 말한 회복탄력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이스라엘 역사 관통은 신학을 오래 해 온 필자에게 신선하게 어필되기에 충분했다. 몇 가지만 나누어 보자. “이스라엘과 유다에는 수 세기에 걸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지배로 인해 부서졌을 트라우마 이전 사상(ideas)이 많이 있었다. 그 지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순종’하는 방법을 찾았다.”(p,59.) 고통에 순종하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을 하나 예로 든다면 호세아가 줄곧 주장한 유일신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해 도적같이 임한 멸망이라는 호세아의 예언은 비장했지만 북쪽을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예언은 제자들에 의해 글로 살아남았다고 저자는 적시한다. 그의 글이 살아남았다는 말의 신학적 함의가 무엇일까? 유다에 임한 충격이다. 저자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 보자. “아마도 이미 글로 기록됐을 호세아의 예언은 어떤 식으로든 남쪽 유다에 이르렀을 것이다. 바로 거기 유다에서 이러한 호세아의 예언은 이후 구약성서 신학의 씨앗이 됐다.”(p,60.) 적어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눈으로 목도 하던 유다는 현실로 다가온 유다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살아남은 호세아의 글로 인해 작용했다는 말이다. 유다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모색이 시급해졌다. 그 대안은 호세아가 외쳤던 유일신론 사상이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에 대한 설명, 약한 통제감을 줄 만한 무언가를 찾았을 것이다. 유일신론이 이에 대한 설명이 됐다.” (p,61.) 저자의 반전이 신선했다.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대안이 유일신론이라니! 북쪽에서 사역했던 호세아의 유일신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필드가 유다였다는 그 증거를 요시야의 개혁에서 찾는다. 기실, 국가라는 명맥을 유지했지만 국토의 80% 이상이 북쪽을 와해시킨 앗수르에 의해 잠식된 나약했던 유다에게 점점 다가오는 북쪽 운명과 같은 멸망의 트라우마에서 그 대안으로 붙들었던 것이 정치적 묘수가 아닌 신앙적 붙듦일 수밖에 없었다는 저자의 접근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유다가 붙든 신앙적 선택을 저자는 이렇게 적시한다.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토라”(p,82.) 북 리뷰를 정리하다가 이런 소회가 든다. 선민 공동체라고 자부한 유다 공동체가 부러운 것은 그들이 갖고 있었던 영적 자존감, 바로 그것이라고.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트라우마라는 구렁에서 분연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었던 토라 정신, 야웨 신앙이라는 부도옹 사상이자 신앙때문이었다. 어찌 이 기적이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던 역대기 역사가들이 건져 올린 요시야에게서만 보이는 일이랴! 저자는 본서에서 이런 종류의 트라우마 극복기를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골고루 포진시킨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는 이미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던 사마리아 유민들이나 고대 근동 공동체와 비교할 때 대비할 수 없는 소수(the minority)였다.(p,186) 그런데도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로 이어지는 성전, 성벽 재건이라는 기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종교적 외형들의 수축이라는 성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이라는 큰 그림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에스라는 이전 포로민의 ‘남은 소수’가 다음 세대에 생존하지 못하게 될 것을 깊이 걱정했다. 그러나 에스라의 도움으로 설립될 수 있었던 유대교는 마치 트라우마 교훈에 의해 형성된 것처럼, 매우 강한 회복탄력성을 입증했다.(p,190)” 저자의 글을 읽다가 필자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M 과정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보았던 교재에 기록된 박준서 박사의 글이 오롯이 떠올랐다. “역대기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해 주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은 누구냐? (Who? 의 문제) 즉 누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둘째, 이스라엘은 무엇이냐? (What? 의 문제) 즉 이스라엘의 주체성과 자기의식을 무엇에서 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종교교재편찬위원회편, “성서와 기독교-구약성서”, 연세대학교 출판사,p,91)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노도와 같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경험했던 무시무시한 트라우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도리어 그 현상들 앞에서 거룩한 회복탄력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영적 디펜스 메커니즘의 역할을 한 정신이자 신앙이었다. 카는 이어가는 연속의 章인 예수 시대, 사도시대, 기독교 초기 시대, 그리고 이후 교부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시대까지 집요하게 선민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들을 선명하게 소개한다. 물론 이 시대의 트라우마 역시 거룩한 회복탄력성이라는 화두로 풀어간다. 지면상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동시에 글을 접하기를 바라는 마음 플러스다. 저자의 비장함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어 소개한다.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대로 있다.”(p,318) 이 문장이 던져주는 메타포는 의미심장하다. 왜? 선민 공동체만을 향한 화두의 던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2년 넘게 펜데믹이라는 동굴 안에 갇혀 살았다. 동시에 엔데믹을 말하지만 기실, 불확실성 투성이다. 실로 지금처럼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시대가 페스트 이후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도 깊은 집단적 트라우마의 심연에 빠져있는 게 사실이다. 저자의 말 대로다.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대로 있다.”(p,318)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자가 추적한 대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집요하게 붙들었던 바로 그것을 우리도 붙들 수밖에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붙들어야 할 21세기의 토라는 무엇일까? Who am christian in our day? What is christian in our day? 데이빗 M. 카는 오늘 필자와 독자인 당신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더불어 에필로그에서 질문을 던진 저자는 희망을 넌지시 보여준다. “트라우마는 세계의 실제적인 특징과 세상 안에 있는 삶에 대한 더 깊은 지혜로 인도할 수 있다.”(p,322.) 트라우마를 피하지 말자. 두려워하지 말자. 야웨 하나님이 주신 성경이라는 특별계시 안에 담겨 있는 ‘다바르’를 붙들자. 결코 가볍지 않게 말이다. 십수 년 전,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야드 바쉠을 방문했다. 2층 전시실에 동판에 쓰여 걸려 있는 이 문장을 보며 숙연해 졌다.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 그렇다. 거룩한 회복탄력성의 비밀은 ‘다바르’의 기억이다, 되살림이다. 반추다, 오늘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살 수 있는 대안이다.
PS: 역자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삐지겠지만, 함께 낸 친구의 두 권(‘성도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 와 본 서) 중에 필자는 번역서에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 역시 차준희는 귀한 친구다. 건강을 위해 화살기도 한다.
월요일의 서재는 언제나 행복이 넘친다.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바하의 G-선상의 아리아 OST 선율이 천상의 운율을 연주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신비롭다. 한 주간이 은혜롭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