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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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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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10-07 09:4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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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하얼빈’(문학동네, 2022)을 읽고 “이토는 숨을 몰아쉬었다. 비서관이 범인은 조선인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토는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바보 같은 놈.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 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p,167) 김훈이 공들였을 이 장면을 읽다가 속울음이 터졌다. 너무 기쁘고 감동적이어서. 마치 내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조선 총독부의 통감 자리를 내놓고 제국주의 일본의 추밀원 원장으로 떠나기에 앞서 이임사를 맡겼다가 미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 썼다. “거듭 말하지만,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제국은 동양 천지에 고래(古來)의 거악(巨惡)과 싸워가며 이 구조물을 제작하고 있다. 이것이 동양 평화의 틀이고 조선 독립의 토대이다. 조선은 스스로 이 틀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 황제와 백성이 함께 신생을 도모할 수 있다. 헛된 힘을 쓰지 말라. 쉬운 길을 두고 험로로 들어가지 마라. 제국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조선은 닦여진 길로 들어오라. 조선의 사직은 제국의 품 안에서 안온할 것이니, 한때의 석민(惜閔)을 버리고 장대한 미래를 맞으라”(pp,821-82) 무능력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던 힘없는 대한제국에게는 치명적 비수요 치욕의 건더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수모의 글이지만, 이토는 대단히 건방졌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본의 거대한 악의 집단이자, 축일 뿐이라는 사실을 궤변으로 포장했다는 것과 조선의 얼을 우습게 여긴 무지다. 이토의 이 건방짐을 무너뜨린 기개가 대한의 얼이자, 대한 젊은이의 자존감이었던 안중근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1도 알지 못했다. 또 하나는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거대한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통치하시는 철저한 영역임을 물리적 힘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패거리 정치집단의 보스이자 괴물이 알 리 없다. 일본이 이 일을 한다니 소가 웃을 일이고, 개그콘서트보다 더 웃긴 일이다. 네덜란드가 배출한 걸출한 신학자의 말을 이토 히로부미가 알 리가 있겠는가!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서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강연 중에서)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청년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는 틈틈 자료와 기록들을 찾아보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족적을 찾아서 일본의 여러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 원고의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늙었다. 나는 안중근의 짧은 생애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했고,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변명하자면,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뭉개고 말았다. 2021년 나는 몸이 아팠고, 2022년 봄에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 나는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루어 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나는 바로 시작했다.” (pp,305-306)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이런 면에서 김훈은 사명자다. 저자는 이 소설을 마감하는 에필로그 가장 마지막에 이렇게 글을 남겼다.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었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하여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고 다르지 않다.”(p,307) 소설을 읽는 내내, 내게서 떠나지 않은 절망감이 있다. 안중근에게 영세를 주었던 빌렘 신부의 독백 기도가 그렇다. “교회 밖은 하느님 나라가 아닌지를 빌렘은 하느님께 물었다.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p,248) 당시 천주교회의 이 천박한 무능력과 무지함을 보았다. 동시에 김훈의 대언으로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우리 교회 이름을 되새겼다.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 교회 존재 목적은 본회퍼가 말했던 것처럼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다.” 당시 조선 교구의 수장이었던 주교 뮈텔은 안중근을 이렇게 두 번 죽였다. “안중근은 스스로 교회 밖으로 나간 자이다. 범죄에 대한 형량은 세속의 법정이 정하는 것이다.”(p,249) 저자의 이 문장을 읽다가 C,S 루이스의 글이 떠올랐다. “고대인은 피고인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현대인의 경우엔 그 역할이 뒤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계십니다. 인간은 상당히 이해심 많은 재판장입니다. (중략) 재판은 하나님의 무죄 방면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이 피고석에 계시다는 겁니다.” (C,S 루이스, “피고석의 하나님”, 홍성사,p,329.) 왜 이 생각이 났을까? 엘리 위젤의 걸작인 ‘나이트’를 보면 어린 피펠이 교수형을 당할 때 아이가 가벼워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고 30분이 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는 것을 본 아우슈비츠의 한 유대인 수감자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한다. 바로 그 때 엘리위젤은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술회하는 글이 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엘리위젤, “나이트”, 예담, pp,122-123.) 아무리 뮈텔이 재판석에 앉아 피고석에 앉자 있는 안중근을 출교시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안중근의 자리에 앉아 계실 것을 확신한다. 안중근을 사형 언도한 그리고 시행한 여순 법정, 사형장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자리인 피고석에 함께 하고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나는 하얼빈에서 이토의 광기를 보았다. 반면, 안중근의 의기를 보았다. 113년이 지난 오늘, 독도 해역에서 욱일기가 나부끼는 일본 군함들이 출몰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국치(國恥)를 다시 본다. 다시 대도시의 한 복판 거리에서 도요타와 렉서스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민낯을 본다. 강제징용을 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기업에게 요구하는 배상에 미적거리며 다시 눈치 게임에 들어간 이 정부의 분노할 행태를 본다. 유니클로 매장에 다시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는 기막힌 소식도 듣고 있다. 화이트국가에서 대한민국을 배제한다는 서류에 잉크자국이 선명한 데도 다시 이 땅의 대통령은 일본 총리에게 정상 회담을 구걸하고 있다. 일본에게 다시 철저히 지고 있다. 나에게는 하얼빈의 총성이 여전히 울리고 있는데, 총연(銃燃)의 냄새가 현재진행인데. 아프고 아프다. 다시 전율하면 읽는다. 이 문장을
“이토는 숨을 몰아쉬었다. 비서관이 범인은 조선인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토는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바보 같은 놈.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 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