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스스로 행복하라2024-06-11 10:1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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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법정
ㆍ출판사 샘터
ㆍ작성일 2021-12-28 21:16:02

 

법정의 “스스로 행복하라”, (샘터, 2021년)를 읽고



언젠가 불교계에서 이판승으로 존경받던 법정의 설법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가 전해준 불교적 영성에 대한 기억은 실은 별로 기억에 없는데 오히려 그가 내뱉은 한 마디에서 거룩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4대강 사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불도저로 밀어붙이기를 하던 때였는데 그가 전언한 한 마디가 이러했습니다.
“개신교에서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있는 그대로 자연을 보존하는 것일 텐데 그 창조의 섭리를 계승하고 보존해야 할 기독교 지도자 출신의 통치권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무시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토목 말고는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강덕,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p,10.) 
나는 내 글에서 이렇게 그때의 소회를 피력했다.
“당시 강연에 참석했던 자들이 치는 박수는 저에게는 불교에서 기독교를 향하여 내리치는 서슬이 시퍼런 죽비 소리처럼 들려 오금이 저렸던 아픔이 있었다. 불교계 사유함의 거목이라는 그의 말은 결코 타종교를 비하하거나 천박하게 매도하는 공격의 소리가 아니었다.” (위의 책, p,10.)
일본 메이지 대학 문학부 교수인 사이토 다카시가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 단단한 내공을 쌓아 삶의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우리가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은 한정되어 있어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깊은 내공을 쌓는 데 필요한 재료의 질과 양을 더하는 행위이다.”(사이토 다카시,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걷는 나무,p,8.)
적어도 그날 법정의 울림은 사이토 다카시의 말대로 무엇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는 내공으로 필자를 직격했다. 왠지 모를 수치스러움이 내게 몰려왔다. 이것이 필자의 거룩한 분노를 자아내게 했고, 타종교의 성직자인 법정의 독서력을 추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개신교 목사로서 공부하지 않는 게으름, 타성에 젖어 있는 상투성, 생각하지 않으려는 천박성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왠지 모를 사명감이 불타오르게 되었고, 법정이 읽었다는 책들을 수집하여 그가 이미 독파한 약 400여권의 책을 3년여 걸쳐서 따라잡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독서했다. 그렇게 내게 동기 부여를 해준 법정은 적어도 독서하기의 분야에서만큼 필자에게는 은인과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번에 법정 열반 10주년을 맞이하여 샘터에서 펴낸 법정의 글모음이 ‘스스로 행복하라’는 제하로 출간되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그의 글들 대부분은 필자가 다른 그의 책에서 섭렵한 문장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을 생각하며 법정의 문장을 다시 만나면서 이런 소회가 들었다.
“법정이 법정했다.”
이 책 안에는 그 유명한 ‘무소유’를 비롯하여 ‘텅 빈 충만’, ‘거룩한 가난’ 등등 그의 대표적인 수필들이 다시 탄생되고 있다. 다시 읽어보아도 귀하다.
3장의 제목이 ‘책’이다. 법정이 살아생전 읽으며 은혜(?)를 받았던 책들이 다시 소개되고 있는데 너무 반가웠다. 알퐁스 도데의 ‘황금의 뇌를 가진 사나이’를 시작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전기 모음인 페루지아 전기 ‘발자취’, 미하엘 엔데의 ‘모모’,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헬렌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등등 정말로 주옥같은 고전 등을 그의 기억으로 되살려주니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10여 전에 법정을 추적하다가 만난 이 책들은 지금 필자에게는 법정이 시사하며 선물해 준 그 이상의 놀라운 혜택을 주었다. 조르바가 춤을 추며 자유함으로 외쳤던 노랫말이 지금도 나를 흥분시킨다.
“이키 키클릭 비르 테펜데 오티요르 오트메 데 키클릭 베민 데르팀 예티요르 아만! 아만!”(니코스 가찬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 책들, p,434.)
(작은 언덕 위에서 다리가 붉은 자고 한 쌍이 울고 있네 자고요 울지 말아라, 내 아픔만으로도 충분하니, 아만! 아만!)
불교의 승려가 전한 말이 개신교 목사의 심령을 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는가? 비본질적인 자기를 벗어버리고 본질적인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옷들을 벗어던지고 그것에 가려져 있는 본질의 나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를 離慾(욕망으로부터 벗어남) 또는 出塵(먼지의 세상에서 떠남)이라고 부릅니다.” (p,29.)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법정의 이 말에 필자는 아멘 했다. 목사라는 신분으로 산지 30년째다. 불교의 승려는 이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설파하고 있는데 목사인 나 스스로가 목사로 살면서 이욕과 출진의 마음을 갖고 목사로서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불교를 향해 우상의 종교라고 감히 공격할 수 있겠는가 싶다.
법정은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를 먼저 전한다.
“안정과 편안함은 타성의 늪이다. 쉼 없는 탈출과 새로운 시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이는 죽은 존재입니다.”(p,35.)
마크 뷰캐넌이 말했다.
“지나치게 안전한 신(the god who is too safe.)은 우리들을 경계지역의 거주자로 만들어버린다.”(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p,42.)
한국교회의 목사와 신자들 모두가 공히 곱씹어야 할 명제가 이것이다. 구도의 삶은 언제나 불편한 여행이라는 것을. 신앙인의 모습으로 천로역정의 길을 찾아 나선 기독자가 순탄대로의 길을 걷는 것을 신앙의 이상향으로 보았다면 존 번연은 천하의 역적이지 않겠는가! 왜? 그토록 어려운 길을 찬미했다니 말이 되는가 싶어서다.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목사와 성도가 편안함을 포기하는 길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가, 아니 내가 섬기는 세인교회가 이렇게 되기를 기대하고 또 기대한다.
“여백이 없는 사유는 자칫 환상이나 망상으로 치닫기 쉽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p,96.)
강제함이 포장된 부드러움으로 변질된 교회, 물리적인 압박을 은혜로 둔갑시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여백이 존재할 리 만무다. 여백이 없다는 것은 사유함이 없다는 말과 일치한다. 저자가 2021년의 끝자락에 있는 내게 이렇게 충고한다.
“한 해가 기우는 마지막 달에 자기 몫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저마다 오던 길을 한 번쯤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포기한 인생의 중고품이나 다름이 없다.” (p,96.)
벼락과 천둥소리로 들었다. 일찍이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성찰을 풀었다.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이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처음처럼”, RHK,p,39.)
이 세밀함으로 들여다보는 행위가 살필 省, 살필 察의 省察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나를 성경에 비추어 성찰하는 한 나도, 교회는 다시 일어설 것을 믿는다. 2021년 끝자락, 나를 철저하게 살피자.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났는데, 그래 너는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p,178- 마틴 부버, “인간의 길”, 분도출판사,p,12.)
저자는 마틴 부버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비수를 던진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므로 한 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욱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p,178)
오늘 새벽 큐티를 하면서 교우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신앙생활이란 내 옳음이 옳지 않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옮음으로 갈아타는 일이라고.
나는 유한한 존재다. 그러기에 나는 옳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다. 법정은 그러니까 더욱 사람답게 살 것을 종용했다. 이제 아쉽지만 여기서 저자와 갈라져야 하겠다. 법정은 나에게 엄청난 도전과 거룩한 부담을 품게 한 선생님과도 같은 존재라고 목사의 자존심을 누르고 피력했다. 허나, 이제 목사의 자리로 돌아와 한 마디를 던져야 하겠다. 사람답게 살라고 전한 법정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않는 자는 결코 사람답게 살 수 없기에 말이다. 법정과 내가 다른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우리 기독교에도 법정 같은 이판 목사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판 목사들이 득실거리는 오늘, 나는 또 이판 목사를 찾아 또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