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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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도서출판 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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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1-07 08:3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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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의 “계절 산문”(도서출판 달, 2021년)을 읽고 “우리는 밤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설게만 생각되는 골목/ 나는 앞서 걷고 있었고/ 너는 저만치 뒤에서 걸었습니다/ 네가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걸음이 빠르면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해/ 이 말을 남기고/ 이번에는 나보다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p,43.) 작가의 글을 읽다가 오래 전에 담았던 마틴 부버의 말이 떠올랐다. “‘너’와 ‘나’는 마주 서 있다. 그러나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렇듯 관계란 선택 받는 것인 동시에 선택하는 것이다. 수동인 동시에 능동이다.” (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p,111.) 박준의 산문 글을 읽다가 왜 인디언들이 드넓고 넓은 광야를 말을 달리다가 중간에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는지 성찰해주었던 류시화 시인의 글이 생각났다. “영혼이 혹시 따라오지 못했을까봐!” 독주라는 말이 횡행하는 시대는 아름다운 시대가 아니다. 그것이 너이든 나이든. 인간이 사는 전 영역에서 그렇다. 같이 걸어가는 보폭의 맞춤이 어우러지는 시대가 행복한 시대다. 박준이 이것을 알려주었다.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야.” (p,91) 저자의 할머니가 읊조렸던 말이란다. 끼니를 잃어버릴 정도로 바쁘게 사는 손주에 대해 그렇게 살지 말고 여유를 갖고 살라는 무게감으로 말씀해 주신 할머니의 혜안이 감동이었다고 저자는 피력했다. 사랑하는 친구가 필자에게 년 초에 출발이 너무 비장하다고 충고했다. 찔렸다. 아내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리고 앞으로 내 식구가 될 아이에게도 비장한 남편, 아버지, 예비 시아버지로 보일까봐 두렵다.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연습해야겠다. 이 나이에 불편함을 주는 꼰대와 노인이 되면 되겠나 싶어서. “사랑은 이 세상에 나만큼 복잡한 사람이 그리고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다.” (p,101) 글을 만나자마자 멍 때렸다. 감동의 충격 여운이 커서. 그래 그러자.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사랑하자. 그래서 남들이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을 테니. 그렇게 살아야겠다. 저자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식당엘 갔다. 그것도 고깃집으로. 당시는 쉽지 않았던 외식을 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직원에게 고기를 자를 수 있게 가위를 달라고 이야기할 것을 저자에게 명했다. 어머니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아들이 오지 않는 걸 보고 걱정이 되어 찾아 나섰는데 음식이 나오는 주방 근처에서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고 안도 겸 고성으로 야단을 쳤다. 외식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어머니가 저자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었는지를. 저자는 답했다.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너무 바빠 보여서 가위를 달라고 하기가 미안했어! (p,125) 글을 읽다가 너무 좋았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았다. 그는 바보인가? 그래 바보라도 좋다. 이런 심성으로 사는 그 누군가가 있어서 너무 좋다. 진보적인 여성 문학평론가인 레베카 솔닛이 전했던 글을 메모해 둔 적이 있다. “사람들은 진실에 굶주려 있다. 아이러니는 이 진실을 볼 때 희망이 생긴다는 거다.” (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창비, p,163.) 착함이 귀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아니라, 우습게 여겨지는 시대다. 하지만 필자는 믿는다. 착한 자가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착한 저자였기에 작가가 되었지. 작가를 아무나 하나. 작가는 이 글 뒤에 어머니에 반응을 적었다. “어머니는 조금 전의 걱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걱정을 새로 시작했다.”(p,126.) 세상 살아가기에 너무 약해 보이는 아들에 대한 부모의 걱정스러운 소회이었겠지만, 나는 왠지 저자와 같이 인생 살기가 쉽지 않은 사람다운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人人人人人”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국어 선생님이 알려주셨던 촌철살인이다. 이 문장의 해석은 이렇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나한테는 또 이렇게 공명된다. 목사면 다 목사냐 목사가 목사다워야 목사지. 이 세상 살기에 조금 어리숙하면 어떠랴. 목사답게 살면서 손해 좀 보지 뭐. 추측건대 저자는 불교적인 기울기가 있는 성향의 사람이다. 그의 글에 불교적인 영성이 많이 보이기에 그렇다. 그가 이렇게 책 말미에 충격적인 글을 썼다. “사찰에서든 교회에서든 성당에서든, 제가 비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저는 아무 것도 빌지 않게 해달라고 빕니다.” (p,154) 저자의 마음이 예쁘다. 그리고 소박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저자가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욕망의 나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존재가 태생적으로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도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감사의 조건이라는 것으로 만족했으면 좋겠다. 필자는 오늘도 기도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하루가 되게 해 달라고. 글을 끝내자. “덮어둔다는 것은 어느 낮은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하는 것이고, 그곳으로 흘러오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반긴다는 뜻이며, 한참 세상이 지나 그 위에 무엇이 쌓였다 해도 변함없는 것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입니다.” (p,157) 산문의 끝판 매력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받았다. 이런 통찰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인문학적인 감성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복이다. 단테는 신곡의 연옥 편 11곡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무량하게 위에서 처음 내리신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베푸셨으니, 당신의 부드러운 숨결에 감사하도록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힘이 온갖 피조물에 의해 찬미받으리이다.”(단테, 신곡-연옥“, 민음사,p,100.) 단테의 기도대로 주님의 ‘부드러운 숨결’을 난 문학 도서들을 통해 느낀다. 박준의 글이 그랬다. 2022년, 많은 이들이 덮고 있는 책이 읽혀지는 복 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내 글은 독자들에게 따뜻할까?
갑자기 이 질문을 던지니 두려워진다. 새 해 첫 주 스타트가 좋은 느낌이다. 독서 일과는 물론 리뷰까지 마치고보니. 서재에 오늘 울리는 곡은 슈베르트의 ‘adgio’인데 찌지찍 거리는 소리가 너무 좋다. 시골에서 너무 오래 살아 촌스러워서 그런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