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최승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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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도서출판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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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1-15 21:3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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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도서출판 난다, 2021년)를 읽고 TH.M 대학원 석사 논문의 논제를 설정하면서 정신분열증(schizophrenia)과 귀신들림(demon possession)과의 inter-relationship이 정말로 존재하고 가능한 일일까를 질문하면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했던 치열한 공부가 결국 논지가 되고 말았다. 당시 연신원에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라는 증명서를 내고 부지런히 연대의학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정신분열증에 관련된 논문, 저널, 그리고 DSM 총론서까지 탐독하며 논문 작성에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힘들었지만 그때의 수고로 인해 적지 않은 정신분열증에 관한 의학적 개념 이해와 치료 방법까지 섭렵하는 보너스를 얻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에 대한 치료와 예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저자의 병력 중에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물론 종교라고까지는 정의할 수는 없지만 버금간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닌 신비주의에 함몰됨으로 야기된 부작용이 원인이었지만 시인이 절필을 선언하고 고립무원에 빠지는 과정을 왜 경험했는지를 본 산문을 읽으면서 적지 않게 공감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의적 해석을 해 보았다. 시를 쓰는 작가의 완벽주의가 불러온 비극이었다. 필자가 남긴 이 정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더 이상 소통이 되지 않는다. 왜? 시다운 시를 쓰며, 시를 쓴 작가가 살려고 했던 시다운 삶에 대해 먹칠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를 쓰는 장인의식이 집요했다. “전반적으로 시들이 재미있어졌다. 빠르고 가볍고 탁탁 튀는 시들이 독자에게 새로운 읽는 재미를 선사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것이 대체로 읽는 순간의 재미일 뿐이라는 것이다. 읽는 재미는 생겼으되 느끼는 재미는 줄어들었다. (중략) 시들은 이제 쉽게 쓰이고 쉽게 잊히고 쉽게 버려진다. 장인의식은 죽고 순발력만 남았다.” (pp,133-134) 저자의 이 글을 읽다가 3인칭 관찰자로 머물고 있던 나는 1인칭 객관적 시찰자의 모습으로 견인됨을 느꼈다. 언젠가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의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가 강연 중에 ‘독서는 빡세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곁들여 그는 이렇게 양념을 쳤다. 치열한 독서를 이어갈 때 좋은 글쟁이도 될 수 있다고. 필자도 30년 이상,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설교문 작성은 업이었다. 거룩한 성직인 목사의 일을 세속적인 잣대로 표현한다고 공격해도 어쩔 수 없다. 설교 행하기를 위해서는 설교문을 작성해야 한다. 설교문 작성은 글쓰기다. 물론 설교 원고 작성을 글쓰기라는 정의로만 접근하기 어려운 것임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언어와 기독교적인 교리의 적용을 차치하고 표현하자면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것은 글쓰기임에 틀림없다. 최승자 시인의 말로 돌아가 보자. 살 떨리는 두려움이 임한다. 세속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인도 작금의 글쓰기, 아니 좁혀 시 쓰기에 대해 장인의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시를 쓰는 순발력만 키워보려는 얄팍함이 판을 치고 있음에 한탄하는 그녀의 높은 가치관을 보면서, 하물며 영적인 영역을 책임지고 있는 목사로 사는 나는 지금 어떤 글을 쓰며, 어떻게 글을 쓰고 있는가를 복기하면 수치스럽기 그지없다는 자괴감이 있다. 나는 목사 장인인가, 순발력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모사꾼인가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기에 말이다.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p,157) 저자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일파 중에 하나인 수피즘에서 전승되고 있는 이 문장을 소개한다. 수피즘에서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또 전승되고 있는 이 문장에 대해 독자들의 소회가 궁금해진다. 즉답을 들을 수 없기에 필자의 소회를 대신해 보고 싶다.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적어도 이 문장의 통찰을 진중하고 담아내는 자가 시인이 되어야 하며 글을 써야 한다.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이 문장은 보석처럼 영롱 인다. 저자는 이 글을 마음에 담아 놓았다. 아마도 너무 소중했을 것이기에 보관했으리라. 개인적인 여럿 이유로 절필을 선언했던 저자가 다시 문단으로 돌아와 그 동안 간직해 놓았던 산문들을 독자들에게 비장한 마음으로 내놓은 용기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작가는 아직도 질병에서 완전히 놓임을 받지 못한 상태다. 아마도 다시는 완전히 치유 받지 못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는 글 쓰는 순간이 저자에게 임하는 치유의 카이로스라고 해석하고 싶다. 많이 메마른 시대다. 너무 건조한 때다. 모쪼록 작가가 툭 던지는 시인의 언어 한 마디가 소낙비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정래 선생의 한 마디를 던져본다. “‘창작’을 해야 하는 작가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 앞에 서야 하는 존재들이고, 그 새로움은 ‘자기 부정’부터 해야 하는 ‘극기’의 길이고, ‘길 없는 길’입니다. 외로우나 그래서 보람 있는 길이지요.” (조정래, “시선”, 해냄, 2014년,p,254.)
외롭지만 보람 있는 길에 다시 서기 위해 재등장한 한 게으른 시인을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