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동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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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대한기독교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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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1-20 11: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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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하박국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박동현, 대한기독교서회, 2011년. “자기 힘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된 자” (p,54.) 저자는 바벨론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갈대아 사람에 대한 메타포(metaphor)는 저자가 갖고 있는 기막힌 통찰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유다를 치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바벨론이었지만, 결국 그 바벨론의 교만을 하나님이 이렇게 정의했다는 점은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학자적인 지성을 엿보게 하는 이 단문을 심비에 새기면서 오늘 내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본다. 획득된 힘이 마치 나의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우글거리는 대한민국의 정글 숲을 지나면서 오늘 목사로 살아가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인가에 대해 깊이 부심하고 있다. 나는 망루에 올라서서 자기 힘을 하나님이라고 착각하는 저 바벨론에게 무참히 짓밟힐 조국을 향하여 통절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이러시면 되겠습니까?’를 묻는 절규함이 있는 목사인가 묻고 또 묻는다. 2012년에 구약학회 소장으로 있는 친구가 보내준 본서를 근래 다시 꺼내 읽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2022년 망루에 올라서기 위해서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1) 히브리어 ‘마초르’의 번역인 ‘성루’를 학자들은 어느 특정한 장소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예언자 하박국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처럼 저자도 장소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박국의 기다림을 더 강조하는 행동에 방점을 두며 ‘성루’를 이해했다. (p,82.) 학자들의 의견에 일견 동의했지만 설교를 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목회자인 필자는 성서 해석의 큰 왜곡이 아닌 것을 전제하여 NIV 성경에 번역된 ‘rampart’ 즉 ‘성루’로 ‘마초르’를 적용하고 싶었다. 예언자의 다급한 마음이 성루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보리라’라는 단어의 무게감 때문이었다. 예언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질문했던 무자비한 갈대아 사람들을 들어 유다를 치시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을 예언자는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천명했다. 얼마나 예언자가 조국을 사랑했는가의 치열함을 공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서 필자는 이런 치열함으로 성루에 올라선 예언자를 응원했다. 하박국 예언자의 이 치열한 질문에 야훼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2:4절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뛰어남을 넘어 탁월함을 보여 준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개역개정) 의 기존 번역을 저자는 이렇게 재 번역했다. “보라 그의 마음이 건방지도다. 그 안에서 바르지 못하도다. 그렇지만 의인은 자신의 성실함로서 살아남으리로다.”(p,78.) ‘에무나’를 ‘믿음’이 아닌 ‘성실함’으로 번역한 것, ‘이흐예’를 ‘살리라’가 아니라 ‘살아남으리라’고 번역한 예는 필자에게 신선했다. 이유는 이렇다. 믿음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기다림’이라는 성실함으로 인식시켜 준 것도 압권이었고 또 하나, 더 지성적 동의를 표한 부분은 ‘이흐예’를 ‘살리라’라는 단순히 희망적인 은유가 섞인 표현이 아니라 ‘살아남으리라’고 해석하며 유다를 향한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더 강조한 저자의 사역(私譯)이 필자에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3:16절은 하박국 예언자의 에필로그 노래다. 그 중 ‘내가 기다리므로’로 번역한 히브리어 ‘누아흐’를 저자는 ‘내가 한숨짓는다.’고 축자 번역했다.(p,177) 이희학 교수는 야훼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인 바벨론에게 허락한 권한은 임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이희학, “예언자들의 신앙과 삶”, 프리칭 아카데미, p,250.) 결국 예언자가 바라고 또 바랐던 방법의 응답이 임했다. 필자를 전율하게 한 감동은 유다의 회복, 바벨론을 향한 심판이라는 해피엔딩의 구도로 막을 내리는 메시지를 예언자가 받았지만 하박국은 깊은 한숨을 쉬며(누하흐) 자신의 격정을 토로했다는 점이었다. 예언자는 이래야 한다. 나의 아픔만이 아픔이 아니라 너의 아픔도 아픔으로 느끼는 자가 예언자다. 시대가 아프다.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프다. 이런 동시의 아픔을 끝까지 개인적으로 승화시키는 예언자의 자질을 존경하도록 만든 저자의 노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책을 다시 서고에서 끄집어 내 손에 잡고 씨름하면서 목회의 현장에서 오늘도 치열하게 영적 포화를 맞고 있는 필자는 생각했다.
“나는 시대의 암울함 때문에 장탄식을 하고 있는 목회자인가? 나는 깊은 장고의 한숨을 내쉬며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당하고 있는 아픔에 대하여 민감하게 울고 있는 목사인가? 이런 고통의 승화 없이 그냥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가 없어도 기뻐하며 감사하며 노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며 개인적인 목회의 승리만을 목적하는 하는 이기적인 목회자는 아닌가를 뒤돌아본다. 시대의 아픔에 대한 장탄식을 생략한 채로 개교회적인 목회의 승리만을 위하여 달려가는 목회자가 된다면 하박국의 외침을 그냥 메아리치며 되돌아오는 사장(死藏)된 헛구호로 치부할 것이 분명하기에 말이다. 귀한 양서를 펴내준 박동현 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