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9월 10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8:0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 가을에 하고 싶은 일은?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마음 속에 근심 있는 사람 (365장)
● 복음성가: 하나님의 은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다시
● 본문 : 창세기 35:9-15
1)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가신 실례를 설교를 통해 정리해 보자.
⓵   



  

2) 벧엘에서 5번째로 야곱에게 오셔서 복을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은?

  

3) 적용하기
⓵ 하나님이 나에게 다시 찾아오신 간증 나누기.
⓶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전히 찾아오신 그 은혜에 대해 내가 보여야 하는 반응은?  

 
사역하기 (WORK)

지역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주중 기도제목 중보하기
⓵ 셀에 속해 있는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⓶ 교회 주보에 실려 있는 주중 중보기도 드리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사역하기

⓵ 11월 19일 추수감사주일에 초청할 전도대상자 선정하기
⓶ 17일 주일에 전도대상자 명단 드리기
⓷ 3/4분기 사역에 최선을 다해 참여하고 성실하게 섬기기
⓸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사사기 본문을 오늘 창세기 114번째 강해 설교에 앞서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접근해 보십시다.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물리적 폭력에서 벗어났고,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에서와의 극적인 화해도  이루었습니다. 모두가 야훼 하나님께서 일하신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20년 전에서 야훼께 서원했던 루스 즉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이라고 하는 눈에 보기에 살기 좋은 땅을 택해 정착했다가 딸이 이방 남자에게 욕보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이로 인해 아들들에 의해 자행된 부족 학살이라는 참극도 경험하는 불행에 직면하게 됩니다. 적지 않은 혼돈을 경험하고 있는 야곱에게 야훼께서 오셔서 20년 전에 약속했던 서원을 갚으라는 하명을 받고 야곱의 일가는 치욕의 땅, 세겜을 떠나 드디어 벧엘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서원을 행하게 됩니다. 오늘 본분은 이렇게 벧엘에 올라가 야훼께 제사를 드린 야곱에게 제사를 흠향하시고 난 뒤의 보고서입니다. 본문 9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이 구절에서 제가 특히 눈여겨보게 되는 부사가 있습니다. ‘다시’입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십시다. 야훼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노정 중에 루스에 도착하여 피곤해 잠이 들어 있던 야곱에게 오셔서 밧단아람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야곱을 격려하셨습니다. 이윽고 20년이 지난 어느 날, 야훼 하나님은 야곱에게 오셔서 이제는 다시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외삼촌 라반이 자신을 해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알려주시기 위해 다시 야곱에게 오셨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드디어 야곱은 가족들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얍복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천사의 모습으로 오신 야훼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세겜에서 참극을 경험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야곱에 야훼 하나님은 오셔서 20년 전의 약속을 상기시키셨고,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 야훼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오셔서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야곱과 함께 하셨던 야훼  하나님의 과정을 설명 드렸는데 어떠셨습니까? 이제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오십니까? ‘다시’  다시 오신 야곱에게 오신 야훼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야곱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밝혀주시며 두 가지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11절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⓵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⓶ 네 후손들을 통해 한 민족을 이루고, 왕이 나오게 될 것 이렇게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본문 13절에서 야곱을 축복하신 뒤에 그를 떠나십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을 접하고 나니 앞에서 언급한 사사기 말씀이 더 치열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내가 다시는 너희들은 구원하지 않겠다는 사사시대에 외치신 하나님의 일성이 얼마나 섭섭하고 또 섭섭했으면 그 정도였을까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야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 번 오시고, 두 번 오시고, 세 번 찾아오실 만큼 신앙적인 자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여타 다른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서 오시고, 다시 오시고, 또 다시 오신 것은 야곱이 갖고 있는 완벽함 때문이 결코 아니었음을 수차례 나누었습니다. 재론하지만 그는 형을 속인 치사한 인간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합작하여 장남을 왕따 시킨 아주 질 나쁜 인간 말종(末種)이었습니다. 늙어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농락한 불효자였습니다. 똑같이 사랑해야 할 아내들을 편애한 공평하지 않은  남편이었고, 훗날에는 아들마저도 편애하여 결국 11번째 아들이 고난을 당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야곱을 접근한다면 하나님이 그토록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실 만큼의 영적인 장점을 갖고 있는 자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 것을 우리는 또 다른 성경을 통해 만납니다.

이제 다시 사사기로 가십시다. 배신의 배신을 거듭한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사사 옷니엘 시대를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의 시대마다 하나님께 배신하고 또 배신을 거듭한 상습범들이었습니다. 이런 상습범들이었기에 입다 시기에 다시 구원을 요청하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이스라엘에게 손사래를 치는 하나님을 결코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  적어도 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 자라면 직시해야 하는 교훈입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사사기 10:13-14)는 메시지에 조금도 항의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입다 사사 시대 전의 이스라엘에게 대단히 단호하셨습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상습범들에게 이제 더 이상의 관용을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 주신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사사기 10:16절을 보면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야훼께 상습적이기는 하지만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을 제거해 보이자 하나님이 이렇게 반응하셨다고 사사기 가자는 말합니다. 16절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세상에 이런 바보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다시는 이스라엘에게 지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구원을 요청하는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단호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흔들렸음을 보고하는 게 16절입니다. ‘곤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말’을 영어성경 KJV는 ‘grieve’(슬퍼하다)로 기록했고, RSV는 ‘not bear’(견디지 못하다)로 번역했습니다.  더불어 ‘근심’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카차르’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무엇을 대변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당하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시고, 슬퍼하시는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과 사사기의 등장한 한 사건을 동시에 살피면서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다시’ 라는 설교 제목의 영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다시’의 현재적 유효성의 대상이 바로 ‘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깊이 성찰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야곱에 비해 어떻습니까? 적어도 야곱에 비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율법적으로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나에게 여전히, 항상, 늘 오셔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십니까?팀 켈러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18세기 복음주의 권의 위대한 설교자인 조지 휫필드 목사의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우리가 자기 의(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깊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의는 우리 마음에서 빼내야 할 마지막 우상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 제가 행한 모든 최선의 행위를 가지고도 저는 여전히 저주 받아야 할 인생입니다.”(팀 켈러, “설교”, 두란노, 87쪽)

  정말로 무시무시한 자기 성찰이지 않습니까? 내가 야곱보다 나은 것은 1도 없습니다. 나는 오래 전에도 야곱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야곱이고, 분명히 내일도 야곱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조금의 여유나 인정할 만한 여백을 줄 수 없는 자가 바로 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시인하는 자에게만 오늘 레마의 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시고, 또 다시 찾아오셔서 여전히 내게 복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대상자는 내가 야곱임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목양하며 평생을 목회하며 살아온 목사가 느끼는 최고의 자괴감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느끼고 있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무력감입니다. 나는 언제나 옳고 너는 언제나 틀리다고 생각하는 대책 없는 자들 때문에 느끼는 자괴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오늘 레마는 대단히 은혜롭게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극단적으로 접근할 때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별 볼일이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은 그를 다시 찾아오시고 또 다시 찾아오셔서 그를 만들어 조각하셨고, 그를 복의 근원이 성취되도록 사용하신 도구로 삼으셨던 것처럼 오늘 나도 그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접목이니 얼마나 위로와 은혜가 됩니까? 그러니 오늘 레마는 적지 않은 감동으로 내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입니다.
  문제는 이런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는 재앙은 그러기까지 하나님의 양보하심, 하나님의 용서하심, 하나님의 눈물 흘리심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영적인 뻔뻔함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교우들에게 계절병을 앓고  있던 섬기는 교회 집사 딸을 위해 40일 금식을 하며 다음과 같은 서원 기도를 드렸던 그 교회 담임목사의 아내이야기를 설교 예화로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는데 만에 하나, 그 딸을 데리고 가시려면 차라리 내 딸 들 중에 한 명을 데리고 가시고 집사의 딸을 살려주십시오.”

  제가 이 예화를 드린 의도는 이후 하나님께서 은혜 중에 그 사모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집사의 딸을 치료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그 사모님의 자녀들도 승리했다는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설교 이후의 후담은 대단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지체 한 명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직업적인 관점을 갖고 볼 때 그 사모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목사님이 너무 그 사모님의 일을 미화시켰습니다. 목사니까, 사모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죠.”
  말씀의 은혜는 3인칭 주관화를 시키라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이유는 그 말씀이 내게 1인칭 객관화가 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접목되어 싸늘하게 죽어 있는 나를 살리는 영적 무기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야곱과 별 다름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가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며, 말씀의 유효함이 오늘 내게 임하는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1인칭 객관화한 야곱은 비로소 자기를 직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교제를  시도하게 됩니다, 본문 14-15절을 읽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그렇습니다. 우리도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동의한다면 내 삶의 현장을 하나님과 전인격적으로 교제하는 벧엘로 만들어야 합니다.

결론) 20세기 선지라고 하는 아이든 토저의 일갈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요즈음 구원을 받는 것을 자동식으로 생각하는 치명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서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자동식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동전을 넣는 구멍에 백 원짜리 신앙을 집어넣고 손잡이를 잡아 당겨라. 그러면 구원이라는 자그마한 카드가  나올 것이다. 그것을 지갑에 넣고 가라.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백 원짜리 신앙을 집어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다음 그 카드 뒷면에 서명했거든요.” (아이든 토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16-17쪽)
  아이든 토저가 하나의 비유를 썼지만 나는 이런 부류 중에 염려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양산되고 있어도 교회가 눈감고 있다는 염려입니다. 내가 진짜로 야곱과도 같은 무익한 존재인데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마저도 종교적인 습관, 익숙해 있는 기독교적인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빌미 삼아 너무 마땅히 내게 베풀어져야 할 하나님의 당연한 처사라고 믿는 괴물들이 많아질까 두렵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내가 야곱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결코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직시하십시오. 그게  은혜에 빚진 성도의 믿음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